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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ther May 06. 2024

자라는 솔방울

천천히 긴 호흡으로 희망 품기

2022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한 적이 있다. 1,200명을 대상으로 대표 12개 수종(소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감나무, 플라타너스, 벚나무, 버드나무, 잣나무, 향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기타) 중 선호하는 나무를 응답받았다. 이 조사에서 소나무는 37.9% 응답률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1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보통 관상용 식물 이름은 잘 알아도 자생식물 이름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소하게 생각하는 것을 감안하면, 보기가 없이 주관식으로 조사 응답을 받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소나무를 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남한 산림의 21~26% 정도가 소나무라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소나무를 모를 수 없다.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 지리산 천년송을 비롯하여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사철 푸른 소나무는 오늘날에도 그 기품과 기개로 칭송받고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나무, 하지만 우리는 오월이면 온 세상을 노랗게 뒤덮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소나무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부분도 많다.


초봄 각양각색 나무들 마다 돋아내는 새순으로 산은 듬성듬성 설레는 파스텔 색감으로 생동한다. 초봄이 지나 진녹색 잎으로 산이 짙어지기 시작할 즈음 소나무는 이미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다. 사월 하순에서 오월 초순사이 바람 부는 날 소나무가 있는 먼 산을 보면 요맘때만 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을 타고 산 위로 노란 꽃가루 연기가 춤추듯 뿜어져 나오는 광경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늘을 향해 자연스레 바람에 따라 흐르는 입자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행위예술이나 설치예술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극강의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소나무는 꽃가루를 날려 보내 수정을 하는 풍매화이다. 한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다 피지만 수꽃이 암꽃 보다 먼저 피고, 암꽃이 수꽃보다 높이 위치하여 제꽃가루받이를 피한다. 소나무 암꽃이 수정되면 솔씨를 품은 솔방울이 된다. 하지만 이때 생기는 솔방울은 우리가 아는 모습이 아니라 어른 손톱보다 작은 초록 울퉁불퉁 솔방울이다. 초록색 뭉툭한 수류탄 모양 솔방울은 가을이 되면 갈색으로 바뀐다.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부터 점점 커지는 솔방울은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개를 활짝 펼쳐 솔씨를 날려 보낸다. 


운 좋게 간혹 가지치기하지 않은 소나무 가지에서 올해 생긴 작은 초록 솔방울, 혹은 뭉툭하고 자리 몽땅한 갈색 솔방울, 날개가 펼쳐지지 않은 솔방울, 미처 떨어지지 않은 묵은 솔방울 등 여러 모양의 솔방울들을 한 번에 관찰할 수 있다. 산길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어여삐 땅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들은 소나무 나뭇가지에 붙어 70∼100개의 솔씨를 바람에 실어 보내는 소임을 다 한 솔방울들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눈에 솔씨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솔방울 안에서 18개월 동안 자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물로 치자면 18개월 동안 아기를 뱃속에서 품고 키우고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매년 키도 자라고, 새 씨앗을 잉태하는 와중에 직전 해에 품은 씨앗도 키워내는 소나무!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게 바쁠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소나무를 알면 알수록 겉으로 보이는 푸른 기개가 아니라 내면의 굳건하고 강인한 생명력에 매료된다. 선비의 나무라 칭송받는 소나무는 사실 강한 모성애로 사랑받아야 마땅할지도 모를 일이다. 소나무라는 생명에 집중해 볼수록 나도 소나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매료되는 성품을 지닐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인생에는 천천히 긴 호흡을 가지고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고 끝이 보이는 일들이 있다. 조급해하지 않고 내 마음에도 매일 하나씩 희망의 씨앗을 품고 마지막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순리에 따라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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