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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BOM 11시간전

반성문


장마 기간이다. 해마다 겪는 장마지만 매번 낯설다. 한밤중마저 뜨뜻 미지근한 바람에 잠을 설친다. 






지난 2주간 꽤 우울했었는데, 지금은 또 멀쩡하다. 도서관에서 집에 올 때 모처럼 사뿐사뿐 내려왔다. 



'지금 이 공부를 하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앞서 전보다는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지. 열심히 하자.' 



잊고 있던 목표도 상기시켰다. 진도가 연이어 밀리는 탓에 그냥 다 포기할까 싶었지만 어려운 파트를 지나니 또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집에 왔더니 동생이 김치찌개를 끓여놓았다. 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코딱지만 한 냄비에 찌개를 끓일 사람은 동생밖에 없다. 냄비 뚜껑을 열고 먹고 남은 양을 보고, 슬쩍 두부 몇 개 집어먹어 보니 예상 적중. 맛이 새콤하고, 두부도 먹기 좋게 썰어 넣은 게 아빠에게 긴장하라고 말해줘야겠다.  






 지난주 토요일에 병원에 갔다. 작년 이맘때쯤엔가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곰팡이 제거제를 썼는데 숨이 답답했다. 며칠 지나고 괜찮아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잊고 지냈는데, 지난주 목요일인가 장마가 심해지면서 딱 그때 화장실 청소했을 때처럼 숨이 답답했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과 숨이 짧아지는 게 확 느껴져서 덜컥 겁이 났다. 병원 가는 길에 안 좋은 생각에 또 눈치도 없이 눈물이 찔끔 났다.



호흡 체크를 하는데 인쇄되는 그래프까지 보지 않아도 호흡량이 평소랑은 확연히 달랐다. 많이 들이쉴 수도 내쉴 수도 없었다.


의사 선생님도 전반적으로 호흡량이 적다고 했다.



약국에서 약이 나오자마자 바로 한 포를 먹었다. 



며칠 지나서 숨이 편해졌고, 가슴이 뻣뻣한 느낌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지금도 뻣뻣하다고 느꼈던 그 피부 뒤에 옹골차게 자리 잡은 듯한 가스 구슬이 목구멍 위로 기분 나쁜 가스를 스멀스멀 올리고 있는 모양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고 있지 않은 거 같다. 찜찜하다. 



낮에 내내 일부러 숨을 크게 뱉으며 공부했다. 답답하다고 느끼는 딱 그 부위에 있을 것 같은 가스(?)가 조금이라도 밖으로 나가길 바라면서. 이비인후과에서 쓰는 기계로 그 막힌 듯한 부위만 훅 빨아들여주면 뻥 뚫린 느낌이 딱 좋을 것 같은데, 별일 없겠지? 



이번 주에 병원 한 번 더 가야 하는데,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봐야지. 


'선생님, 석션 한 번만 하면 다 나을 거 같아요. 그런 건 없나요?'



조금만 힘들어도 세상이 망하길 바랐었는데, 막상 목구멍 끝에서 올라오는 공기가 달라지자 삶이 더없이 소중해버리다니. 우습기도 하여라. 사람이란, 아니, 내가 얼마나 얕고 간사한 인간인지 깨닫는다. 






샤워를 하고, 자기 전 오늘을 남기려 타이핑을 부랴부랴 친다. 하루 내내 두드리고 싶었던 타자기다. 



새삼 감사한 것들을 헤아려본다. 



- 이 나이에, 이렇게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라는 걸 할 수 있다. 


- 도시락으로 식비도 아끼고, 살도 덜 (안 찔 수는 없다) 찌고 있다.


- 요즘엔 동생이 요리에 관심이 생겼는지 찌개류를 종종 끓여놓는데 맛이 좋다. 


(개인적으로, 우리 가족 중에는 제일 내 입맛에 맞게 해줘서 먹고 나면 꼭 잊지 않고 칭찬을 해준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다. 


-오래됐지만 아직까지 열 일 하는 에어컨 덕에 습하지 않게 잠이 든다. 


-나만의 아샷추 레시피로 카페인을 낮에 마셔도 이제 밤에 잠드는 데 문제없다. 



하늘에 계신 그분께 한 대를 맞은 기분이다. 너의 유한함을 잊지 말라고, 장마 따라 다시 훅 가슴 한 대를 퍽 치고 가신 듯하다. 



화장실에서 클렌징 오일로 블랙헤드를 열심히 문지르며, 납작 엎드렸다. 




'반성합니다, 그동안 굉장히 오만했습니다. 허락해 주신 시간에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고, 죽고 싶지 않다. 건강하고, 오래, 행복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낄낄거리며 살고 싶다. 



몸에 좋으라고, 물을 한 잔 더 마신다. 기분 나쁜 공기가 몸에서 빠졌으면 하여 괜히 헛기침한 번 더 크게 한다. 아, 이제 면역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자러 가야겠다. 



겸손해지고 감사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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