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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엘리온 Feb 06. 2024

자라지 못한 모성


또다시,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생후 8개월 된 아들을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양부 A 씨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또 검찰은 A 씨의 학대 행위와 아들의 의식불명을 알면서도 방치한 친모 B씨도 함께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따르면, A 씨는 새벽 시간에 울면서 잠을 깨우는 아들을 홧김에 발로 찼다고 하는데요.  발에 차인 아들의 머리가 가구 모서리에 부딪치면서 그 자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친모 B 씨는 이 모든 정황을 알면서도 남편의 말에 따라 아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고 합니다...  


뉴스 채널에 고정되어 있는 TV에서는 음악 대신 카랑카랑한 앵커의 목소리가 배경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조대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걷고 있던 나는 드문드문 들려오는 비참한 소식에 하던 일을 멈추고 TV앞으로 다가갔다.

앵커의 말처럼, 또! 

또다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가 당한 고통이 먹먹함으로 가슴을 적시는 사이, 아나운서는 이미 다른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바뀐 TV화면을 재빨리 쫓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이전 영상의 잔상을 보고 있던 나는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어야 했다.     


교도소라는 곳은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이런 뉴스에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비난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마음속 말들이 아우성치지만,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는 않는다.

학대 부모를 향해 즉각적으로 퍼부어대던 비난들을 잠시 미루어도 늦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기사 속 엄마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나면,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갑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출근을 했다.

반복되는 일과들로 오전 시간이 흘러가고 잠깐의 여유가 찾아왔을 때 ‘일일중점관찰대상자’ 지정을 담당하는 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 수용동에 언론보도자가 한 명 들어왔습니다.  신변을 비관해서 혹시나 극단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 같은 것은 없는지, 일일중점관찰대상자로 지정되어야 할지, 좀 잘 살펴봐 주세요.  상담하고 나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만나고 나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수용자 정보 시스템에 접속한다. 

‘아동학대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위반죄’라는 죄명을 가진 여자 수용자의 명단이 보였을 때, 내리고 있던 마우스 스크롤 휠을 멈춘다. 

이름을 클릭하자, 언론보도자임을 알리는 팝업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심중에 한숨을 토해낸다.  팝업창을 닫고, 범행 내용이 적힌 사건개요를 읽어 내려간다.  기록의 주인공은 양부도, 아이도 아닌 친모 B 씨이다.  뉴스에 보도된 내용보다 조금 더 상세하고, 일부 다른 내용도 섞여 있는 듯하다.      


나 역시,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기에, 막상 B 씨를 만나려니 편하지가 않다.  

‘나는 재판관이 아니다’라는 말을 되뇌고, 되뇌지만, 지은 죄에 대한 판단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3일 안에 신입 수용자를 상담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은 복잡한 마음을 삭힐 시간을 충분히 허락해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녀와의 만남을 ‘상담 한 건’이라는 ‘실적’으로만 처리하는 것이다. 

감정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다.  피상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적당한 위로를 건넨 후 잘 지내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자리를 뜰 것이다.

그렇게 생각 정리를 한 후, 친모 B 씨가 있는 수용동의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친모 B 씨가 둔한 몸을 이끌고 쭈뼛쭈뼛 상담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나름의 마음 준비를 한 것이 허망했다.

‘교도소’라는 곳이 무서워서 주눅이 든다고 말한 그녀는 아이에 대하여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삼촌이 보고 싶다며 울었다.  회피적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그 울음이 너무 천진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부모의 손을 놓치고 겁에 질려있는 아이 같았다.  그 모습이 당황스러워 내가 다른 사람의 사건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했다.   이 어리둥절함은 대화가 좀 더 진행된 후에야 사라졌다.  그녀는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설명해줘야 할 만큼 이해력이 부족했다.  언론보도자이니 좀 더 주의를 기울여달라는 직원의 전화가 무색할 만큼 그것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웠다.  언어가 빈곤했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지저분했고, 단추는 짝이 맞지 않게 꿰어져 있었다.  자기 돌봄조차 힘겨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키워내는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 애초에 버거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모 B 씨는 지적장애자였다.

어떤 범죄 사건이 정신질환과 관련이 있을 때마다 과할 정도로 그것을 언급하던 언론에서 왜 그녀의 지능 수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을까?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라는 말을 들었다. 

가해자의 개인사가 아닌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친모 B 씨를 만나면서 이미 그녀에게 존재하고 있는 서사를 대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10대 때 겪은 두 차례의 성폭력, 원가족의 부재, 폭력적인 현재의 남편, 그리고 지적장애... 그녀의 삶에 쓰인 기록들이 이 끔찍한 사건과 무관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한 여자 아이가 떠올랐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예쁜 교복을 입었을 그 아이는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매 달 찾아오는 생리혈을 처리하지 못해 엉덩이 부분이 붉게 젖어 있기 십상이었다.  그 아이 역시 성폭력 피해 후 낙태의 경험까지 갖고 있었고, 우리는 자궁절제술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고민해 보았다.  물론, 그 엄청난 폭력 앞에 단지 임신을 막는 것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이것이 인간적 존엄을 지켜주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몹시 미안하지만, 그 아이의 삶은 짐승과도 같았고, 그 아이를 떠난 가족이 이해될 지경이었다.    


친모 B 씨는 그 아이에 비하면 꽤 인간적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여성’으로서 당하는 피해가 그 아이를 연상시켰다.

친모 B 씨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사실상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지인’이었다.  어떤 사이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학대 피해자인 아들은 이전 동거남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이다.  동거남이 임신한 그녀를 떠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녀로 하여금 해바라기센터 상담을 받게 만든 성폭력 가해자들과는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현재 동거남을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친모 B 씨에게 그 아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적장애라는 것은 모성이라는 것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녀는 삶 가운데 있었을 ‘피해’를 ‘피해’로 인지하고는 있을까? 

‘피해’와 ‘가해’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모성애’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동물도 갖고 있기에 당연히 본능이라고 생각했던 모성애가 후천적인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만이나 모유수유 과정에서 많이 나오는 옥시토신 호르몬이 모성애를 유발한다고 하지만, 이런 생물학적 변화를 겪지 않고도 입양아들을 잘 키워내는 부모들을 봤을 때, 모성애라는 것은 애착과 돌봄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학대에 장기간 노출된 아이들의 뇌는 감정을 느끼는 편도체의 용적이 감소된다는 연구도 보였다.  실제로, 19세기말 편도체 이상이 발견된 원숭이에게서 모성애가 결여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친모 B 씨의 모성애도 이런 메커니즘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까?  그녀가 받은 피해가 가해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런 연구 결과들이 엄중한 무게로 다가왔다.      


지적장애자 친모 B 씨의 시선에 닿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질환이 범죄를 정당화시켜 줄 수는 없겠으나, 성급한 비난 이전에 그녀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관심을 가져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한다. 

친모 B 씨는 ‘처벌’ 받아야 하고, ‘보호’ 받아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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