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반복되는 질문에 짜증을 내는 아들. 반면, 그 아들의 어린 시절 "이건 뭐예요?", "이건 왜 이래요?"라는 끊임없는 물음에 미소를 머금으며 몇 번이고 대답해 주던 아버지를 그려내던 공익 광고가 있었다.
"원한다면 천 번이라도 더 말해줄 수 있어"라는 소년의 말을 보면서 이 광고가 떠올랐기에, '뭐지? 부모의 사랑을 말하고 싶은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에도 책은 산양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계속해서 담아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저자의 의도를 알아내고 싶은 성급함이 밀려온다.
이번에는 '이 책은 신앙서적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내 옆의 대상을 통해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려 하는 경향이 있는 나에게 가장 완벽한 존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그 대상으로 인해 내가 멋진 사람이 된듯한 기분, 그 대상으로 인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그 대상'의 존재는 사람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신(神)이었기 때문에.
이쯤 되면, 정말이지 '아가페'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부모나 신의 사랑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며 나는 또다시 섣부른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아니란다.
굳이 소년의 사랑에 빗대어 그런 거룩한 사랑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저자의 어린 시절 반려 동물이었던 산양을 떠올리며 쓴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그 산양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며 쓰고, 땀 흘리며 쓰고,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썼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떤 마음인지 쉬이 와닿지 않는다.
내가 '엄마'라는 존재가 되어보기 전까지는 이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저자의 마음을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내가 그 누군가에게 이런 대상이 되고,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기 산양이 완벽하고 멋지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기 산양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 책을 만난 탓에, 나는 앞으로 이런 사랑을 더 소망하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변화된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책의 내용보다는 표현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감탄을 자아내는 이런 표현들은 번역가의 언어인지, 작가의 언어인지 궁금해진다.
특히, 저자가 아는 사람일 경우 글로써 상대를 새롭게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글을 통해 만나고 있는 그의 평소 생각이 궁금하고, 마음이 궁금하고, 가치관이 궁금하고, 오늘의 기분이 궁금하다.
쉐타오 글
왕샤오샤오 그림
정이립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