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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엘리온 Apr 18. 2024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들

A: 제 몸 안에는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죽인 아내와 딸만 살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까지 같이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족은 제 입을 통해서 말을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기만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방 수용자가 혼잣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앗! 나도 가족들과 대화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해보니깐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하하! 얼마나 기뻤던지…… 그 이후로는 수시로 가족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안부를 묻거나 응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몸은 교도소에 있지만, 가족들이 늘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고 힘이 됩니다. 제가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데, 만약 이것이 착각이라면 너무 허무할 것 같습니다.     


B씨: 제가 계속 웃는 이유요? 사실, 제 귀에 대고 늘 속삭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이 조금 민망하거든요. 무슨 말이냐면…… 음…… 제가 잘 생겼대요…… 풋!     


C: 제가 여기 들어와 있는 이유를 선생님도 아시리라 생각했는데, 모르신다니 설명드릴게요. YG엔터테인먼트 아시죠? 옛날에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했던 양현석이 운영하는 회사요.  제가 그 회사를 인수하려고 YG 주식을 마구 사들였거든요. 양현석 대표가 그걸 알고선 겁을 먹었는지, 저한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서 여기 보낸 거잖아요. 그런데 걱정은 안 해요.  제가 사업을 크게 하다 보니 정계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거든요.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사 아시죠? 유영하 변호사. 일단 그 사람 좀 부르려고요. 제가 투자하고 있는 로펌들이 많기는 한데 유영하는 보수 쪽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어서요. 양현석이 사람 잘못 건드린 거죠.  흐흐……     


D씨: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가석방으로 일찍 나갈 거예요. 출소해서 30년 정도는 가족들과 살아봐야죠. 그러려면 여기서 건강관리도 잘해야 되고, 수용생활도 모범적으로 해야 해요. 그렇게 지내고 있으면, 형기보다 일찍 빼준다고 텔레파시로 전달받았어요.       




운전을 하다가, 길을 걷다가, 청소를 하다가…… 문득문득 이들의 말을 떠올린다.

‘어쩌면, 이런 정신병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이 병의 심각함을 잊은 채 부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찰나, 이번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고개를 내민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러다 피해자들 생각에 화들짝 놀란다. 

‘피해자는? 피해자들의 고통은 죽는 날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데, 저네들은 망상, 환각 따위에 숨어버린다고?’     

  



A씨가 가족을 살해한 방법은 참으로 잔인했다.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읽어 내려간 사건 개요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편이 휘두르는 칼에 난도질을 당한 아내, 아빠의 손에 흐르는 엄마의 피를 생생하게 눈에 담은 채, 본능적으로 도망치던 아이들. 하지만 5-6살의 어린 몸들이 성인 남자가 들고 오는 망치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그 순간. 스무 줄 가량의 사건 기록은 현장의 공포감을 지나치리만치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록 속 가해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가족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말하고 있는 내 눈앞의 A씨는 그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다정하고 자상한 한 가정의 가장이 내뱉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믿지 않고는 남은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군요.’

그런데……

가족들도 당신 안에서 살고 싶을까요?’    

 

B씨의 환청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자기가 잘 생긴 걸 본인도 아네요!”

음…… 원빈에 비유하면 짐작이 될까?  예쁜 잘생김이 아닌, 멋진 잘생김!

B의 외모는 그랬다.  

프로그램실의 한 모퉁이가 자신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인양, 늘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살인자라는 죄명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순수한 눈빛은 맹수의 먹잇감이 된 것 마냥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내 그를 괴롭혔던 따돌림과 폭력은 B를 피해자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못난 놈, 멍청한 놈’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주었다. 그 말을 고스란히 내재화하여 스스로도 ‘못난 놈’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와중에 ‘잘생김’이라는 것은 비난이 침범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B씨의 딱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서 환청의 위로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피해자와 가족은 묻는다.

“그의 웃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위로가 될까요?”     


노숙자였던 C씨.  

사업가다운 멋진 모습의 C씨를 상상했다면, 그의 실물을 접하기 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 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어깨 위 비듬, 입가에 번져 있는 빨간 양념의 흔적, 기상 후 세수도 하지 않았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눈곱, 여전히 노숙의 흔적을 품고 있는 누런 때가 찌든 하늘색 죄수복.

길 가는 행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조작된 누명으로 바꾼 C씨에게 죄책감 따위는 필요 없다. 돈과 권력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왕국을 잘 건사하고 즐기면 될 일이다.

당신이 벌였던 거창한 사업은 이미 망한 지 오래입니다지금 이곳에서 나가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추위와 배고픔뿐입니다가족도 버린 당신을 기억해 줄 사람은 피해자의 증오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한다. 그에게 현실 직시는 잔인하다. 반면 70이 넘은 나이에 받은 10년이라는 형기는 그를 다시 길거리로 돌려보낼 가능성이 매우 적다. 즉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굳이 고통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나의 침묵은 그의 행복한 죽음을 도울 것이다. 대신 그 함구의 대가로 나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원망을 시시때때로 상상할 것이다.

적어도자기가 저지른 더러운 짓에 가슴을 치게는 만들었어야죠!”     


살인자 D씨의 유일한 소원은 노모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어머니가 자신이 출소하기 전에 돌아가실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아직 꼬마였던 D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었다. 맞고 있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도망쳤던 어떤 날들의 기억은 그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다행히 몸이 자라면서 발견한 싸움의 재능은 그를 무력감에서 구원해 주었다. ‘내 사람’을 괴롭히는 인간들을 ‘정의롭게’ 처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처벌은 그에게 무기징역이라는 처벌을 되돌려주었다. 의리가 목숨처럼 중요한 D는 교도소에서도 ‘내 사람’을 만들었고, 그들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폭력은 지속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잊지 않았던 어느 날 처음으로 어머니의 답장을 받았다.  

삐뚤삐뚤 꾹꾹 눌러쓴 단 한 줄. 

언제쯤이면 네 얼굴을 볼 수 있니?”

어머니의 편지를 손에 든 D씨는 목청이 쉴 때까지 꺼이꺼이 울어댔다. 자신의 부재가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울어서인지 머리가 아프다고 느끼던 찰나 갑자기 온몸이 감전되듯이 저려왔다. 이것은 그에게 텔레파시가 전달되기 전에 나타나는 징후였다. 가만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신호를 분석하기 위해 집중했다.

모든 폭력을 멈추고 모범수가 되면 10년 뒤에 가석방시켜줄게.”

법보다 더 전능한 텔레파시가 보내온 메시지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D는 변하기 시작했다. 툭하면 뻗쳐 나오던 주먹을 잠재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몸이 불편한 동료들을 도왔으며 영치금이 없는 사람들과는 간식을 나누었다. 

텔레파시가 D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텔레파시 같은 헛소리 그만하세요!’라고 하지 않기로 했다.

D씨는 어머니와 함께 할 소망을 가졌다.  

다만 D씨의 손에 자신의 어머니를 잃은 피해자가 그 소망을 용납할지는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산란해진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대상이 정신질환자인지, 범죄자인지, 아니면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늘 존재하고 있었던 피해자인지.

‘환자’이지만 ‘범죄자’이기에 그 뒤편에 서 있는 피해자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고, 불특정 다수의 고통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재범 예방’이라는 거창한 상담 목표는 이런 혼란스러움을 매우 효과적으로 정리해 주었지만, A씨와 B씨 그리고 C씨와 D씨와 같은 경우에는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기징역과 그에 가까운 형을 받아 다시 범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죄인들을 상대로 ‘치료가 곧 사회 안전이다’라는 주문을 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디선가 본, ‘죄의 반대말은 속죄’라는 문구가 피해자들의 외침이 되어 내 등을 떠미는 것 같다. 이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병증을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겠지만, ‘병식’이라는 것을 통해 이들을 처벌할 권리 또한 나에게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한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들에게 허락된 평화를 깨뜨릴 자신이 없다.

병식을 획득할수록 자살 위험이 높아진다는 일부 연구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깜냥이 되지 않는다. 치료적 세팅이 아닌 교도소는 환자를 도와줄 여력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결국 ‘잔류 증상을 잘 관리하여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들의 각본에 토를 달지 않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가해자와 동조하고 있다는 기분은 외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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