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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런던일상 기록 (feat. 자연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Waitrose, 템즈강

by Daria Feb 28. 2025



다시 돌아온 지*바의 날. 빨간 맛으로 다이내믹 런던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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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Natural History Museum(자연사박물관)에 가기로 마음먹은 날이라 든든히 뱃속을 채운 후 사우스켄싱턴 동네를 향하여 걸었다. 가는 길에 어느 드레스 가게 안에 전시된 꽃무늬의 드레스가 너무나도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봄처럼 아주 화사한 것이 웨딩드레스로 입어도 참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과 똑같은 스타일의 순백색 반짝반짝 웨딩드레스보다는 이런 것이 더 개성 있고 예쁘지 않나 싶은데, 그래봤자 중요한 사실은 웨딩마치 올릴 신랑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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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자연사 박물관은 V&A Museum과 매우 인접해 있어서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된다. 막상 V&A 건물을 보니 V&A로 노선 변경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 들기도 했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자연사박물관에 가겠노라 마음먹었을 때 실행에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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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력이 없어서 아무래도 카페인을 먼저 수혈하는 편이 좋겠다 싶어 근처 에스프레소바를 찾았다. 에스프레소바 옆에는 South Kensington Books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이따 집 가는 길에 들러야겠다고 보자마자 점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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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선택한 커피숍은 'Hagen Espresso Bar'로, 런던에 몇 군데의 지점을 두고 있는데 나는 사우스켄싱턴점을 방문했다. (나중에 소호에 있는 하겐도 가게 됐는데 두 매장을 방문해 본 바로는 매장마다 그리고 직원마다 커피 맛의 편차가 약간 있는 것 같다.) 하겐에스프레소바 사우스켄싱턴점은 친절하고 명랑한 직원들이 인상적이었고 커피 맛은 무난하게 괜찮았다. 내게 커피를 만들어준 직원의 손톱이 아기자기하니 매우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I love your nails! Did you do them yourself?"라고 했더니 자기가 직접 한 거라면서 자랑스럽게 활짝 웃었다. 직접 한 거라니, 정말 대단한 손재주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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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 수혈을 마치고 (아직 약발이 들지 않는 것 같지만) 다시 일어나 부지런히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지나가다 자연사 박물관을 몇 번 보긴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본 것은 쪽문이나 후문이었던 것인지, 정문 위치로 오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으리으리했다. 정원도 딸려 있고 건물 규모 자체가 엄청 커서 웅장하고 멋있었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촬영지였던 것으로도 유명한 런던 자연사박물관은 실제로 마주하니 그 커다란 규모에 영화의 감동이 다시금 전해져 오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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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무식하게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보면 외벽 하나하나 이처럼 공들여 섬세하게 건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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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박물관답게 출입문 아치 안에 동물들의 조각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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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를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건물 안에 들어오자마자 마주한 로비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동심을 성냥에 불꽃이 붙듯 탁 불러일으켰다. 다 큰 성인도 보자마자 감탄사가 나오는데 아이들이 보면 얼마나 더 신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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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는 공룡을 비롯한 포유류들의 뼈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로비에서부터 아이들의 흥미를 잡아끌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해 보인다. 이것도 직업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내내 아이들이 오면 정말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였다. 맛있는 과자를 먹으면 "오.. 이거 수업용 간식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흥미로운 곳에 가면 "오.. 이거 아이들이 오면 좋아하겠는데?", 재미있는 오락거리나 문학을 보면 "오.. 아이들이랑 수업시간에 같이 하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새삼 이 정도면 일에 너무 과몰입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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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이렇게나 다양한 새들이 존재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정교하게 박제되어 있는 공간이 흥미로웠다. 또 한편으론 나도 몰랐던 여러 조류들의 영문명을 알게 되어서 유익한 시간이기도 했다. 자연사박물관에서 영어 공부하는 영어 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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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과로 나뉘기 전까지의 학창 시절 중 나는 과학 세부과목 중에 생물과 지구과학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전시공간이 내게는 가장 흥미로웠다.

"지구의 과거를 탐험하는 여정...  뜨겁고 작은 불덩어리였던 우주의 시작부터...  대륙과 바다가 움직이는 오늘날의 살아 있는 행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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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들을 측정함으로써 태양계의 나이를 알아낼 수 있는데, 그리하여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 6천만 살이란다. 그 긴긴 시간 동안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여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그리고 현재의 인류가 된 것임을 생각하니 웅장이 가슴... 아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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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게 생긴 이 광석의 이름은 Stibnite로, 매우 부드러워 손으로 구부릴 수도 있고 촛불 위에서 녹일 수도 있다고 한다. antimony의 원천인 이 Stibnite는 총알, 케이블피복, 금속활자, 배터리 등의 제조에 사용되고, 고대 이집트 및 그리스 사람들은 이들을 갈아 눈 화장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들이 모두 알고 있다시피 이것들은 유독성 물질이니... 과거의 사람들은 외모와 생명을 맞바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현재의 우리가 쓰고 있는 화장품들도 딱히 무해하다고 할 수는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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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마자 내게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시킨 이 광석은 Pyrite(황철석)로, Fool's Gold라는 별명을 갖고 있단다. 왜 바보의 금인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약간 빈정 상한다(?). 아무튼 황철석은 황산을 제조하는 데 사용되어 산업에 매우 중요한 물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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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을 구성하는 주요 광물들이 한데 전시되어 있다. 화강암은 지구에서 가장 흔한 암석 중 하나라고 한다. (맞긴 해...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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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신비롭고 기묘하게 생겼는데 심지어 광석마다 각자의 생김새가 모두 다 다르다. 자연이란 참으로 웅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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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박물관에 입장한 이래로 쭉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는데 나름 큰맘 먹고 발걸음 한 곳이라 필사적으로 견뎌보려 애썼지만 인파 탓인지 무엇 때문인지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포유류 박제 전시관이 너무나 흥미롭고 유익하여 어떻게든 으쌰으쌰 하며 관람하고자 하였지만 더 이상은 도저히 걷지 못하겠다고 여겨져 결국 박물관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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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부지가 너무 큰 탓에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도 너무나 고되고 아찔했지만 어찌저찌 버스 위에 무사히 올라탔다. 아까 전에 점찍어뒀던 서점은 턱도 없었다. 그래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노을 진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위로가 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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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걸신들린 사람처럼 오픈 샌드위치를 화수분에서 샌드위치가 나오듯 계속 만들어 먹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감자칩까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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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폭식을 치르고 좀 쉬니 기력이 회복되어 운동을 다녀왔다. 운동 후 집에 돌아오는 길, 문 열기 전 집 앞에서 바라본 까만 밤하늘에 초승달이 참으로 예쁘고 선명하게 떠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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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아름다운 것들은 주변에 언제나 가득하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주변의 사소한 것들임을 느끼며... 뜻대로 술술 풀리지는 않았지만 결말은 명확한 해피엔딩인 오늘 하루도 달빛 아래 눈을 감는다.






저녁 노을빛이 유난히 아름답더라니 예상대로 역시 오늘은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빗소리에 화음 맞추듯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오랜만에 닭을 끓였다. 부드러운 닭고기가 빠진 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속이 몹시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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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기도 하고 오늘따라 축축 쳐져서 낮 내내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종일 먹기만 하며 빈둥거렸다. 저 놈의 치즈샌드위치는 일단 먹기 시작했다 하면 화수분처럼 계속 만들어 먹게 된다. 하지만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 없는 걸.... 아, 오늘은 집에서 중요한 임무를 하나 완수하였다. 바로 에든버러-런던 왕복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는 일! 내 인생 처음으로 타는 Ryan air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어쩐지 소문이 안 좋게 나 있는 라이언에어를 드디어 나도 좋은지 안 좋은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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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과일도 다 먹었고, 사야 할 생필품들도 몇 가지 있어서 인근의 Waitrose에 장을 보러 나갔다. 나는 보통 Sainsbury's를 이용하는 편이지만 전부터 Waitrose가 궁금했기에 겸사겸사 와 봤다. 장을 다 본 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Waitrose는 비교적 상등의 제품을 취급하는 편이며 다른 마트들보다 가격대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먹는 식품이야 품질 좋고 비싸면 좋지만 위생용품이라든가 잡화류는 다른 마트와 같은 제품을 파는데도 가격이 더 비싸서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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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확실히 스타킹은 전에 Boots에서 샀던 것보다 훨씬 질이 좋았다. Boots에서 샀던 스타킹은 신고 나간 지 하루도 안 되어 보풀이 잔뜩 일어나는 바람에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크기는 또 왜 이렇게 큰지 발목이 헐렁헐렁했다만, 이번에 Waitrose에서 산 스타킹은 사이즈도 잘 맞고 내구성도 좋았다. 생리대는 다른 곳들과 같은 제품인데도 분명하게 더 비쌌다. (생리대 사실 거면 Tesco나 Boots 등등 다른 곳 가세요... 소곤소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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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래저래 중요한 과업들을 여러 가지 해치웠다. 항공권 예매했지, 필요했던 것들 모두 사 왔지.... 밖에 나가 특별한 시간을 보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는걸?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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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rose에서 사 온 Pink Lady 품종의 사과를 당장에 먹어 보았는데 강하지 않은 새콤 달콤한 맛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맛있는 사과였다. 다만 모든 사과에 멍이 하나씩 들어 있어서 그 점이 좀 아쉽다. 함께 사 온 바닐라 비스코프 치즈 케이크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평소에 사다 놓고 티푸드로 꺼내 먹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사다 놓은 아보카도도 후숙이 적당하게 되어 소금과 후추만 뿌려 빵에 올려 먹어도 무척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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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으면 뭔가를 계속 꺼내어 먹게 된다.



어제는 헬스장에 갔으니 오늘은 러닝하러 강변에 나왔다. 오늘도 역시 밤하늘은 맑고 새까맣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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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즈강변 한쪽 벽에는 수많은 하트 낙서들이 수 놓여 있는데 평소에는 이들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웬일인지 하트 속 메시지들에 흥미가 생겨 뜀박질을 멈추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가족, 친구, 연인 등 다양한 관계에 대하여 각자의 애정을 담아낸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왜인지 아주 약간의 작은 외로움이랄까, 그런 서늘한 바람이 심장을 한 번 휘이 관통하고 지나갔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열심히 사랑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 어느 것도 외치고 싶은 사랑이 없어 그저 관망이나 하는 것이... 슬프거나 아쉬운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저 내가 유별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달까. 루돌프 혹은 그린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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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래, 서로들 미워하지 좀 말고 이렇게 서로 아끼고 보듬어주면 좋잖아. 필연적으로 끝이 있는 인간의 삶일진대 서로 반목해 봤자 결과적으론 자해하는 꼴이 아닌가. 남은 인생, D-day까지 하하 호호 웃으면서 보내다 가는 게 근심으로 앓는 것보다 좋잖아?



지구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별 대신 빨간 하트가 가득한 밤하늘을 저 멀리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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