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 몬머스커피, 대영박물관
어제는 하얀 맛 아침식사였는데 오늘은 빨간 맛 아침식사로 하루를 연다. 제육볶음에 달걀프라이 조합은 말해 무엇하나, 아주 환상의 콤비다.
본마망 레몬타르트와 함께 후식 커피를 마시며 잠시 오전 여유를 갖는다. 창밖을 통해 본 하늘이 아주 기가 막히도록 눈부셔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가야만 한다고 '의무감'까지 들 정도였다. 원래 오늘은 British Museum(대영박물관)에 가기로 계획한 날인데 이런 날씨에 실내에만 있는 건 억울하니 소호의 테라스 카페에서 햇살을 좀 즐기다가 느지막이 박물관으로 넘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수집하다시피 할 정도로 선글라스를 너무 좋아하는데 런던에서는 하루에도 여러번 비가 왔다 해가 떴다를 반복하는 날씨에 도통 선글라스를 끼질 않게 된다. 하지만 오늘은 햇살이 아주 기가 막히니까, 비록 며칠 전 선글라스 소매치기를 당한 트라우마가 미약하게 남아있지만, 외출 전 선글라스를 얼굴 위에 얹어 본다. 쫙 땡겨 묶은 머리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롱코트를 입으니 약간 영화 매트릭스 같기도 하고.... 요즘 애들은 아마 매트릭스 모르겠지. 아무튼 소호로 출발!
이때 한국은 영하의 날씨에 눈까지 내리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긴 당장 봄이라 해도 믿을 만큼 따스하고 반짝거리는 날씨를 뽐내고 있다. 건물 외벽은 물론이고 나뭇잎에도 반사되어 빛나는 햇살이 온 도시 곳곳을 보석처럼 반짝이게 만들었고, 하늘은 수채화 물감으로 정성스레 칠한 것처럼 아름답고 은은한 하늘색을 띠고 있는데다가, 가지에 난 새순이며 싱그러운 녹색의 풀잎들까지 모두 모여 화려하고 성대한 봄의 축제를 펼치는 듯 하였다.
사람들도 모두 밖에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듯 보였다.
빅벤도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들은 대체로 밤의 빅벤을 더 좋아하지만 나는 단연코 낮의 빅벤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처럼 화창한 날씨 속에선 빅벤의 진가가 더욱 잘 드러난다.
소호로 향하는 길, 어제 집에서 푹 쉬어서 그런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활기가 넘친다.
지나가는 길에 Covent Garden Market이 보여서 구경 좀 했다.
소호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Monmouth(몬머스) 커피숍에 오늘도 방문했다. 런던의 커피들이 대부분 산미가 강한 편이라 웬만하면 내 입맛에 다 잘 맞는데, 몬머스 커피는 특히나 강한 산미에 다른 풍미들도 풍부하게 어우러지고 무엇보다 우유가 정말 맛있어서 이 집의 에스프레소+우유의 메뉴가 최고다.
날씨가 좋으니 야외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햇살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좀 부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유일한 옥의티라면 옥의티다.
커피잔을 모두 비우고 난 뒤 더 오래 머무르기도 민망하여 금방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이렇게 화사한 시간에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계획이 그런 걸.
대영 박물관은 소호와 매우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아주 좋은 편이다. 대영 박물관 바로 앞에 티룸이 하나 있었는데 하필 내가 온 1월부터 폐점을 해 버려서 참 아쉽다는 T.M.I.를 슬쩍 흘려본다. 마음만 먹으면 가게를 열기에 크게 어렵지 않은 우리나라에 비해 영국은 개인 사업을 승인받기가 조금 까다로운 편이라고 한다. 게다가 일처리도 우리나라처럼 빠르지 않아서 이래저래 개업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고 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연 카페였을텐데, 그리고 장사도 무진장 잘 되었을텐데 어떤 일로 폐업을 하셨을까 궁금하다.
사실 나는 대영박물관은 이번이 처음이다. 갤러리들에 비해서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약탈 수집품의 비중이 높다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불편함이 있달까. 개인적으로 유물보다는 그림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다지 즐겨 방문하지는 않는 편이다. 대영박물관은 그러한 것의 정점을 찍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하여 여태껏 나의 동선 순위에서 밀려나기만 했는데 런던에 오래 머무르다보니 결국 이렇게 대영박물관에도 오게 됐다. 대영박물관은 정말 크고 멋지긴 했다.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관람한 곳은 이집트 유물 구역이었는데 이렇게나 커다란 것들을 어떻게 용케도 싹싹 긁어 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크고 멋지고 재미있기는 했다. 내게 있어 이집트 문화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
가운데 사진 속 조각상은... 무서워야 하는데 어째 좀 귀엽다. 긴 세월 속 풍파에 많이 깎여서 그런지 순한 맛 곰탱이가 되어 버렸다.
거대한 파라오상들도 만나볼 수 있다. 파라오상은 처음 보는지라 흥미롭고 신기했다. 발가락이 엄청 길다. 실제로도 저렇게 길었을까?
사진으로 보니 미니어처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커다란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Amenhotep(아멘호텝) 3세라고 한다. 설명에 따르면, 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이처럼 머리와 한 쪽 팔만을 소장 중인 이 조각상은 본래 Karnak의 Mut 신전 입구에 세워져 있던 것이며,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어서 이처럼 대규모의 화려한 예술품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Amenhotep 3세 후 약 100년, Ramesses(람세스) 2세가 조각상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처럼 약간 수정하여 자기 것인 양 삼았다는 것이다. 설명에 의하면 Ramesses 2세는 이전 왕들의 조각상을 자주 자기 것처럼 바꾸곤 했지만 이처럼 얼굴까지 수정한 일은 드문 사례였다고 한다.
파라오의 권력을 표현하고자 하는 듯 파라오 상들은 하나같이 모두 거대했다. 오른쪽에 나란히 둔 사진 속의 유물은 설명문을 같이 찍어두지 않아서 이게 뭐였는지 모르겠다. 뭔지도 모르고 그냥 멋있어서 찍었나보다.
또다른 거대한 이 좌상의 주인공 역시 람세스2세로, 그는 어떤 파라오들보다도 많은 수의 거대한 조각상들을 세웠다고 한다. 람세스 2세는 생전에 신격화되어 그의 조각상들 중 일부에는 고유한 이름이 부여되기도 했고 사람들이 이에 기도를 올리기도 했단다. 이집트의 모든 조각상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으며 현재도 일부 색소 흔적이 남아있단다. 이를테면 눈동자의 검은색, 살갗의 빨간색, 머리장식의 파란색과 노란색과 같은 것들 말이다.
신비로운 이집트 문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 신전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어서 매우 유익했다. 새삼 런던의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은 작품 하나하나 설명문을 함께 제시해 두어서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고대 이집트에서 신전은 신의 거처, 집과도 같았고, 신전의 벽에는 왕이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사제들이 이를 진행했다고 한다. 아침 해가 뜨면 고위 사제들이 신전을 열었으며, 신상을 정화하고 옷을 입히고 제물을 바쳤단다. 하급 사제들은 제물이 꾸준히 공급되도록 관리하는 허드렛일을 맡았고 말이다. 나아가, 신전은 우주(cosmos)의 축소판으로 설계되어 천장과 벽에는 하늘, 나일강, 식물 등이 그려져 있었고, pylos(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동쪽 지평선을, peristyles와 hypostyles는 식물과 자연을, 내부 성소는 우주 창조 전의 원시의 언덕을 상징했다고 한다. 특권층은 신전의 정원에 자기 동상을 남겨 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신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했으며, 일반인들은 신전 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단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신전 밖이나 임시 제단에 봉헌물들을 남겼다고 한다.
사자의 머리를 한 이 조각상들은 고대 이집트의 여신 Sekhmet(세크메트)이며, The Mighty One(강력한 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태양신 Ra(라)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면을 상징하며 태양 원반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고 한다. 파괴와 전염병의 신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치유의 능력도 있었다고 전해진단다. 세크메트는 다른 여신들처럼 생명의 상징 ankh와 번영의 상징인 파피루스 줄기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귀여운 고양이 조각상은 신과의 소통 매개체 역할을 했던 Gayer-Anderson cat으로, Bastet(바스테트: 이집트 신화에서 가정과 다산, 보호를 담당하던 고양이 머리를 한 여신)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정교한 조각상을 제작 및 헌납하려면 기부자의 신분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부자는 이를 바스테트 신에게 바침으로서 신과 소통하고자 했단다.
그 후, 아프리카 전시관으로 넘어왔다. 이 전시관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 권력, 신앙, 교류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또한 작품들의 출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시관 초입에 놓여 있기도 했고 첫인상이 강렬하여 가장 인상깊게 기억에 남았는데, 동화 삽화 같기도 한 것이 워낙 재치있는 그림이라 조금 더 현대에 가까운 시기에 그려졌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1930년 작품이란다. 옆에 놓여있던 설명문에 의하면, 이 그림은 Haile Selassie 황제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성경 속 인물들 대신 동물들을 그려 넣었는데 여기서 황제는 가운데의 사자로 표현됐다. 당시 이러한 화풍은 에티오피아 예술가들에게서 쉽게 발견되었다고 하니 현대인인 나에게나 재미있지 그 사람들에게 있어 특별한 그림은 아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 신비하고도 흥미로운 조각 작품은 어머니와 아이를 형상화한 조각으로, 아프리카에서 전통적으로 다뤄져오던 형태의 주제를 이어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 작품은 Fulani라는 유목민 집단의 회복력과 성취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전쟁과 갈등으로 인한 고통 및 고난을 표현하고 있기도 한단다.
사진을 보아선 아마도 다른 층의 또다른 이집트, 페르시아 쪽 전시관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았을 뿐이지 박물관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규모가 너무나도 커서 이 공간 전체가 거의 거대한 미로와도 같았다. 오죽하면 내가 길을 찾느라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했던 말이 "This place is like a maze."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흥미로운 작품들이 방대하도록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피로를 유발하는 공간이다.
이 곳은 고대 이집트 미라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시관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곳이 가장 흥미로워서 나중에 이 곳을 보기 위해 대영박물관에 재방문했을 정도이다.
첫번째 사진에서는 사람 머리가 얹어진 항아리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Canopic jars(카노픽 항아리)로, 고대 이집트의 미라 제작 과정 중 몸에서 제거된 간, 폐, 위, 장 등의 내장들을 건조 및 보존 작업을 거쳐 린넨으로 감싸 이 항아리 안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 항아리는 처음에는 둥근 디스크 모양의 뚜껑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사람 머리 모양의 뚜껑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항아리들은 상자 안에 넣어져 무덤이나 장례실 안에 놓였는데 제3중기 이후부터는 내장들을 린넨으로 싼 뒤 다시 몸 안에 넣기 시작하여 더이상 이 항아리는 필요가 없게 됐지만 의례용으로 계속해서 제공되었다고 한다.
가운데 사진에서는 Shabti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전에 일하던 어학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원서에서 Shabti와 파라오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 더욱 흥미를 갖고 살펴 보았다. Shabti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을 대신해 사후세계에서 노동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형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주인의 하인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초기의 Shabti등은 크고 정교하게 조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묻히는 Shabti의 수는 점점 증가했고 이에 따라 크기와 품질 또한 감소했단다.
돌아다니다가 옆에서 도슨트가 진행되고 있기에 나도 끼여서 같이 들었다. 박물관 측에서 정해진 시간마다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하는 도슨트인 것 같았다. 대부분의 설명이 설명문에 나와있는 내용과 비슷했지만 가끔씩 설명문에 없는 내용을 말씀하시기도 하고, 추가 시각자료들을 보여주기도 해서 나름 괜찮았다.
너무 커서 하루만에 다 돌아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므로 다음을 기약하고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꽤 오래 머물렀다. 삭신이 쑤실 지경이다. 전시를 볼 때는 몹시 집중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크다. 박물관을 나와 집에 가는 길에 The Atlantis Bookshop이라는 예쁜 서점을 봤는데 너무나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몸이 힘들어서 집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집 가는 길에 Horse Guards 구역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길래 궁금해서 가 보니 근위병들의 작은 의식 같은 것이 치러지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행위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언제 어느때고 변함없이 빅벤은 참 아름답다.
국회의사당 근처여서인지 거의 매일같이 크고 작은 시위가 열리는 이 동네. 오늘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브렉시트의 문제에 대해서 부르짖고 있다. 이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유명한 노래를 개사하여 표현했는데 듣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더라. 새삼 음악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기에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거실의 TV로 Janine Jansen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Leonard Bernstein의 Serenade를 틀어 놓고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어제는 러닝을 갔으니 오늘은 헬스장에 왔다. 오늘도 열심히, 즐겁게 득근을 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다. 헬스가 이렇게 재밌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물론 필라테스도 좋지만 말이다. 모든 현대인들에게 필라테스는 진심으로 강력 추천하는 운동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필라테스는 꼭 퍼스널 트레이닝으로 하는 것을 추천한다. 나도 어릴 때는 금전적 부담 때문에 그룹 필라테스를 했었고 지금은 퍼스널 필라테스를 3년 넘게 해 오고 있는데 둘다 경험해 본 바로는, 만약 필라테스를 할 거라면 조금 더 돈을 써서 퍼스널 수업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룹 필라테스는 초심자에게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쓸데없는 운동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오늘도 아름다운 날씨 속에서 알차게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든다.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도 매일 다른 영감과 배움을 얻으며 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또한 내게 있어서는 특별한 하루였고, 또 찾아올 특별한 내일의 하루를 위해 이제 그만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Sweet 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