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오고자 했던 계획이 엎어지면서 졸지에 어마어마한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나는 매일마다 각기 다른 전시회를 방문하였는데, 오늘 쓰는 글은 그중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조우, 모던아트협회> 전시에 대한 감상 기록이다. '모던아트협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결성된 미술단체의 이름으로, 한묵, 문신, 유영국, 박고석, 황염수, 천경자, 이규상, 정규, 정점식, 임완규, 김경 등이 참여하여 1960년까지 약 4년의 기간 동안 여섯 번의 협회전을 개최하며 현대 회화의 방향성에 대해서 탐구하고 개척해 나갔던 예술가들의 협동 모임이었다. 공식적인 협회 활동은 1960년으로 끝이 났지만 현재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이들은 그 후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며 한국 현대미술사에 수많은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모던아트협회 그리고 해당 전시 취지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은 아래의 사진 속 전시장 해설을 참고하면 된다. 요약하자면, 모던아트협회는 1957년 제도미술과 급진미술 사이에서 한국적 추상을 탐구하고 ‘제3의 길’을 실험한 현대미술가들의 단체였으며, 해당 전시는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점이 된 모던아트협회의 궤적을 돌아보고 한국 현대미술이 어떻게 자기 길을 모색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 전시에서는 한묵의 작품을 여럿 만나볼 수 있었으며, 특히 아래의 대조적인 두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왼쪽의 <흰 그림>은 매우 단조로운 색채와 선이, 이와 반대로 오른쪽의 <엉겅퀴>는 선명한 색채와 거칠고 강한 선이 특징적이다.
<흰 그림>에 사용된 색은 '백색'이라고 뭉뚱그려 지칭되지만 저마다 질감이나 명도, 채도 등이 달라 결코 다 같은 백색이라 칭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작품이 완성된 시기를 함께 고려하여 볼 때, 작가는 전쟁 직후 황폐해진 환경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본질 및 근원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고, 그에 대한 결과물로써 이 작품을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엉겅퀴>는 자연의 생명력을 대표하는 색들을 이용하여, 거친 땅에도 뿌리내리는 들풀 엉겅퀴를, 1955년에 그려냈다는데 의의를 두어 생각해 보건대 이 또한 전후 시기에의 강한 회복 및 극복 의지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감히 작가의 의도를 헤아려 본다.
천경자 고유의 화풍이 확립되기 이전인 초기 작품과 화풍 형성 후의 작품을 비교하며 볼 수 있는 기회도 누릴 수 있었다. 확실히 이전 시기에는 조금 더 현실적 및 사실적인 특징이 두드러지고, 이후에는 환상적이고도 상징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나가는 일은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장미 화가'로 알려진 황염수의 작품들도 여러 점 만나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어딘가 매우 세련된 구석이 있는데, 그는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볼 때 더욱 매력적이며,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는 그의 다수의 장미 연작은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의 또 다른 별도의 전시 공간 ‘보이는 수장고’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방문객들은 부디 귀한 장미 연작 전시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유영국 작가의 작품 또한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본 작품일지라도 볼 때마다 가슴이 새롭도록 뭉클해진다. 그 작품을 마주한 때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매번 감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고 말이다.
특히 이번에는 <새벽>이라는 작품이 몹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림을 보자마자 동트기 직전의 소리 없는 시리고 투명한 공기가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키는 듯했고,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압도당한 채 한참 동안이나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새벽>이 내게 오랜만에 스탕달 증후군을 안겨 주었다.
본 전시는 1950-60년대 기성미술과 신진미술 사이의 과도기에서 현대 회화의 방향을 탐구하고 발전시켜 나갔던 우리나라의 화가들의 실험 정신 및 업적을 재조명한다는 취지를 내보이고 있지만, 그러한 거창한 의의 없이도 그저 순수 작품만으로 감동을 받고 갈 수 있는 훌륭한 전시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적 상황과 작품 배경을 함께 고려하여 감상하면 더욱 풍성하고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전시가 우리에게 이토록 커다란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화가들의 순수한 열정과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마음들이 잘 묻어나는 천경자 선생의 신문 칼럼 발췌문을 아래에 첨부하며 이 글을 마친다.
정릉에 목련이 피던 봄날, 한묵이 파리 유학길에 오르기 전, 모던아트회원들이 박고석 집에 모였다.
각자 음식을 손수 마련해 들고 왔는데, 그중 정규가 가져온 생선은 속이 비어있어 식탁 위에 올리자마자 푹 꺼져버렸다.
그 웃음 섞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들은 모두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시기나 질투 따위는 없었고, 오직 예술에 대한 사랑과 동지애로 뭉친 화가들이었다.
- 천경자, "가난에도 불타는 예술혼", 동아일보, 1984년 4월 6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