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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Sep 17. 2024

[17] 또다시 내셔널갤러리 (feat. 런던 예찬)

런던여행기_내셔널갤러리 2



테이트모던에서 막 빠져나온 내게는 지체 없이 곧장 또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며칠 전에 재방문을 기약했던 내셔널 갤러리다. 그때 당시 사전 조사 없이 방문하여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 미처 작품들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기에, 게다가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 회화 전시장은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기 때문에, 런던의 다른 멋진 곳들을 돌아다니면서도 내 마음 한편에는 내내 내셔널갤러리에 다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넓은 자리를 차지한 채 한껏 존재감을 내뿜고 앉아있었다. 때마침 금요일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내셔널갤러리가 저녁 9시까지 연장 운영을 하는 날이기에 나는 오늘이 딱 적기라고 생각했다. 구글맵에 검색해 보니 테이트모던에서 내셔널갤러리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약 25분, 걸어서는 약 35분 정도 소요된다고 나온다. 낡고 지저분한 튜브 타기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기도 했고 때마침 튜브를 타나 걸어서 가나 시간 차이가 크게 없어서 나는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런던의 겨울은 한국의 겨울에 비해 더 온화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기에, 해 지고 깜깜한 겨울의 밤거리를 30분간 걷는 일은 꽤 고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시린 겨울 공기에 안구는 점차 메말라갔고 두 뺨은 얼얼해졌다. 찬 공기로 눈이 시큰함에 따라 훌쩍훌쩍 콧물도 났다. 이게 웬 사서 고생인가 싶기도 했지만 12월의 런던 밤거리를 걷는 일이란 제법 즐겁고 낭만적인 일임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후회는 하지 않았다.

테이트모던에서 내셔널갤러리로 걸어가는 길.


템즈강변 골든주빌리 다리 아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환한 낮동안에는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곤히 겨울잠을 자다가 해가 지고 어두워지니 곳곳에서 생명이 태동하였다. 거리의 연주자들이 밤의 오르페우스처럼 멋들어진 즉흥연주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두었고, 빵이며 고기 등이 지글지글 불에 구워지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푸드트럭들이 옹기종기 가득 모였다. 또한 잡다한 기념품 등을 파는 크리스마스 마켓 노점들이 환한 조명을 켜고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형형색색 그라피티로 알록달록 꾸며진 굴다리 밑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갖가지 잡기를 부리며 열심히 보드를 탔다. 비록 추운 실외기온이지만 달아오른 활기로 인해 그리 춥지만은 않았다. 내셔널갤러리로 향하는 길은 피로하긴 했지만 여행자로서 즐겁고 들뜨는 산책로였다.

보드타는 청년들.
가는 도중 다리를 건너며 찍은 풍경.


지루할 틈 없이 걸어온 길 끝에서 콧물을 한 번 훌쩍이고 고개를 들어올린 그곳엔 또다시 내셔널갤러리임을 알리는 넬슨기념탑이 우뚝 서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나는 곧바로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의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7세기 이후의 작품들은 한국에서도 곧잘 특별전을 통해 즐길 기회가 많지만 그전 시기의 작품들은 이런 때 아니면 실제로 보기 어렵기에 나는 이들의 실물을 영접하기를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모른다. 크라나흐, 홀바인, 다빈치, 보티첼리, 페루지노, 미켈란젤로, 라파엘, 루벤스 등은 물론이고 조토, 프란체스카, 우첼로 등의 수많은 옛 유럽 회화의 거장들이 그린 이 종교화들은 도판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찬란한 광채를 내뿜으며 보는 이를 압도하였다. 특히나 이들이 각 시기별 회화의 선구자이자 대가로서 선보인,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을 회화 기법들의 시초가 정성껏 발리어진 이 그림들을 보며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옛 대가들의 그림.


화장실 앞에서의 즉흥 셀카. 그리고 굿즈샵 쇼핑.


부지런히 그림을 살펴보며 다녔는데 벌써 또다시 폐장 시간이 되었다. 방대한 컬렉션을 100% 모두 다 감상하지 못한 것 같아 여전히 아쉽고, 심지어는 한국에 돌아와서 몇 달이 흐른 지금도 계속 생각이 난다. 내가 런던과의 사랑에 단단히 빠져버린 이유 세 가지를 꼽으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람들이 친절하고 매너가 좋다. 두 번째, 대도시임에도 전통과 역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세 번째, 문화 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내셔널갤러리와 같은 우수한 양질의 미술관이 많아 짧은 여행동안 다 둘러보기에는 어려워 아예 장기간 눌러앉아있고 싶은 욕구가 용솟았다. 에로스의 화살을 맞고 런던과의 사랑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내셔널갤러리에서 나와 늦은 밤의 런던 거리를 거닐며 사랑이 가져다준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 누릴 수 있는 행복 호르몬이란 호르몬은 모두 누렸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서 그 위엄이 더 짙어진 웨스트민스터사원도, 선명한 자줏빛으로 밝게 빛나는 런던아이도, 방 안에 피운 작은 촛불 하나가 온 방 안을 밝혀주듯 제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빅벤 시계탑도, 모든 것들이 다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이층 버스를 타고 이 일대를 한 바퀴 돌며 숙소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렇게 또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런던에서의 시간들이 알차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밤에는 또 다른 느낌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의 밤은 한국과 분위기가 흡사하다.


난 인스턴트 라면을 싫어하지만 가끔 이렇게 타국 여행 중 먹으면 제법 맛있다.


내일은 기대하던 포토벨로 마켓과 사우스켄싱턴 동네에 가는 날이다. 별이 뜨는 밤이면 어김없이 내게 작별을 고하며 떠나가는 매 하루들이 너무나도 아쉬운데 또 한편으론 뜨는 해와 함께 새로이 다가올 또 다른 새 하루에 설렌다. 오늘 하루도 행복했다. 내일 하루는 또 얼마나 행복할까?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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