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여행기_포토벨로 마켓
비행기에서 내린 이래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성실히 런던 여행자 노릇을 수행해 왔더니 오늘 아침 내 몸은 마치 내게 “날 더 혹사시킨다면 파업을 하고야 말겠어!”라고 마지막 경고를 날리는 듯했다. 웬만하면 계획한 건 뭉그적거리지 않고 으쌰으쌰 실행에 옮기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침실에서 좀 더 뒹굴뒹굴하다가 11시쯤 나가 아늑한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중고 서점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찾아낸 흙 속의 진주를 들고 카페에서 탐독의 시간을 즐긴 후 저녁에 따뜻한 뮬 와인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오는 하루! 생각만 해도 아주 완벽하게 게으르고 여유롭다! 물론 이 게으름은 상상으로만 그칠 것이다. 아니, 그래야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기분 좋은 치즈빛깔 아침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식탁 위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침이라는 그 녀석이 우비를 뒤집어쓰곤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너도 피곤하니? 나도 피곤하구나…. 하지만 너는 앞으로도 오래 런던에 머물테니 아쉬울 게 없겠지만 난 이제 곧 런던을 떠나야 하므로 너처럼 마냥 쳐져있을 수가 없구나.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포토벨로 마켓에 가는 날이다. 포토벨로 마켓은 런던의 3대 마켓들 중 하나로, 영화로도 잘 알려진 ‘노팅힐’이라는 동네에 위치해 있으며, 각종 식료품은 물론이고 빈티지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마켓이다. 포토벨로 마켓은 특히 토요일에 가장 크게 열리므로 나는 일부러 오늘자에 포토벨로 마켓 및 사우스켄싱턴 지역 일정을 계획했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아무리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절대 피우면 안 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같은 숙소의 다른 여행자가 같이 나눠 먹자며 흔쾌히 내놓은 ‘B베이글’의 베이글과 함께 과일 조금, 씨리얼, 우유, 커피 등으로 아침을 먹고 난 후, 날씨가 좀 개기를 기다리겠다는 등의 하찮은 핑계를 대며 최대한 부엌의 그 자리를 지키고 버텼다. 그러나 시간은 내게 더 이상의 관용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내 앞에서 시곗바늘을 돌렸고,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그래도 제법 굵다. 날씨도 꽤 쌀쌀하여 내 손이 절로 옷깃을 여며 쥐었다. 날씨가 썩 좋지 않기는 해도, 막상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오니 마음도 산뜻하고 내 앞에 펼쳐질 하루에 대한 기대로 두근두근 설렌다. 오늘의 여정으로 데려다 줄 빨간 이층 버스를 타고 포토벨로 마켓으로 향했다. 창문에 부딪혀 흐르는 빗줄기가 이 여정에 동화와 같은 신비로움과 낭만을 더하며 내 귓속을 웅웅 울렸다.
드디어 목적지에 이른 나는 두근두근 설렘 가득 담은 첫 발을 정거장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리자마자 파란색 다리와 노란 은행나무가 만나 이뤄낸 아기자기한 동화 마을 같은 풍경이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펼쳐졌다. 거기에 비까지 오니 더욱더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물 위에는 오리들만이 한가로이 오전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축축하고 싸늘한 추위는 잠시 잊은 채 그 푸른색 다리 위를 신나게 거닐며 이곳저곳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아이폰이 담아낸 그 풍경들은 하나같이 영 별로였다는 사실….
어쨌든 다리를 건너고 이어진, 마켓으로 통하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 동네를, 새 지저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즐거이 걸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들어가고 싶게 매력적인 맛집이며 상점들이 나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주말 마켓은 보통 파장이 이르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연신 다음을 기약하며 부지런히 마켓으로 향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마켓에 당도했는지 갑자기 푸드트럭이 즐비하게 선 골목이 나타나 맛있는 냄새로 방문객들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구역을 모두 다 꼼꼼히 둘러본 후에 라비올리를 파는 한 노점을 선택했다. 손님들 앞에서 열심히 뇨끼와 라비올리를 빚고 있는 요리사의 움직임 전체가 내게는 마치 요하임 베케라르의 그림 <4 원소> 속 일부처럼 느껴졌다.
한 10년 전쯤만 해도 한국에서 뇨끼 요리를 파는 곳이 흔치 않아 집에서 뇨끼를 빚는다고 감자 삶고 부엌에 밀가루를 흩뿌려놓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턴가 웬만한 양식당엔 거의 다 뇨끼 메뉴가 자리를 잡게 되어 이제는 뇨끼 먹겠다고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라비올리 요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국에서 먹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라비올리를 선택했다. 그것도 시금치 속을 채운 라비올리를!
그라나파다노가 소복이 쌓인 묵직한 라비올리 한 그릇이 내 손 위에 올려졌다. 크림색 소스 아래에는 초록색 소를 채운 라비올리가 가득했는데, 마치 두꺼운 눈 이불을 덮고 봄을 기다리고 있는 잔디 동산 같았다. 양도 많고 그 맛 또한 매우 좋았다! 노점에서 파는 음식이라고 얕잡아볼 게 아니었다. 양이 정말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맛있어서 나는 거의 설거지하듯 그릇 안을 깨끗이 비웠다. 앞으로 마켓에서 먹어야 할 게 많은데… 시작부터 뱃속을 꽉 채워 버렸다. 이런!
나는 푸드트럭 근처에 서있는 중고 음반 노점으로 다가갔다. 런던 여행 중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오래된 클래식 음반을 득하는 일이 내 희망사항 중 하나였고, 사실 그 이유 때문에라도 포토벨로 마켓에 꼭 오고 싶었다. 나는 매대에 놓인 음반들을 꼼꼼히 뒤적거렸지만 클래식 음반은 없었다. 아니, 아주 소량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겐 그다지 가치 있는 상품들이 아니었다. 매대에는 대개 록 음반이나 재즈 음반이 놓여 있었고 나를 위한 클래식 음반은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음반 득템은 포기하고 그 옆의 중고서적 노점을 기웃거렸다. 한눈에 봐도 빈티지한 멋이 듬뿍 묻어나는 책 표지들은 나의 주의를 끌기는 했지만 막상 다가가 펼쳐보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독서의 용도로 쓰긴 어려워 보였고, 누군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고자 구매한다면 걸맞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왠지 먼지다듬이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책들을 뒤로한 채 마켓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