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여행기_노팅힐서점&포토벨로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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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에 이어지는 포토벨로마켓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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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따라 대형마트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비록 내가 욕구를 한껏 담아 번뜩이는 눈빛을 마구 쏟아붓던 제품을 카트에 담는 것을 끝끝내 엄마가 허락해주지 않을지라도 수많은 식료품들과 물건들을 이것저것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나는 어른이 된 후에도 곧잘 엄마를 따라 대형마트에 갔다. 물론 엄마가 한 눈 판 사이에 내가 집어든 제품을 카트 깊숙이 꽂아 넣고는 모른 체하다가 계산대 앞에서 “너…이 금쪽이….” 라고 말하는 듯한 엄마의 세모눈을 보는 일도 깨알 같은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런 나여서일까. 포토벨로 마켓을 구경하는 일은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웬만한 대형마트보다 훨씬 큰 규모와 다양한 물품들, 특히 신선한 식료품들과 먹음직스러운 즉석식품들, 그리고 중간중간 만나볼 수 있는 찻집이나 베이커리들은 마치 내 앞에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끊임없이 쏟아지는 숏츠들 같았다. 한 손엔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강아지 목줄을 들고선 정말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 나처럼 영국 마켓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와본 여행객들, 그냥 지나가다 들른 사람들, 주말 자선 공연을 나온 거리의 악사들, 그리고 상인들! 이 모두가 한데 뒤섞여 북적북적 쾌활한 아침 시장의 색채와 향기를 만들어냈다. 비 맞으며 라비올리를 먹던 고생이 무색하게 어느새 비는 거짓말처럼 그쳤고 포토벨로의 아침해는 구름 틈 사이로 따사로운 정오의 햇살을 사람들 머리 위에 비추었다. 어두운 것보다 밝은 것을 좋아하고, 밤보다는 아침을 좋아하는 내게는 어쩐지 그 햇살 아래 사람들의 얼굴 역시 조금 전보다는 한결 밝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한 공간 안에서 나는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기분이 화사해지는 것을 느껴졌다.
지나가던 중 커다란 무쇠솥에서 빠에야를 볶고 있는 노점을 발견하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가 돌아갔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앞에 엄청난 양의 빠에야 한 그릇이 놓여있는 상태였다. 요전 버러마켓에서 먹었던 빠에야와는 제법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과연 이 요리사는 어떤 빠에야를 만들어냈을지 두근두근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슬프게도 이 빠에야는 그리 맛있지 않았다. 새삼 버러마켓에서 먹었던 빠에야가 정말 맛있는 빠에야였구나 싶다. 내 옆에 있던 어떤 두 명의 여학생도 이 요리사의 작품에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별로 아름답지 않은 그 작품을 꾸역꾸역 즐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유학 중인 대학생인데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런던에 여행 왔다고 한다. 당시 독일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독일 생활에서 기대하는 장점들을 늘어놓았고, 그들은 실제 독일 생활에서 겪는 단점들을 읊어 주었다. 역시 어느 곳이든 다 장단점이 있고 낙원이란 없구나. (그래도 여전히 독일에선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
우리가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며 빠에야를 먹는 모습이 멀리서 보기엔 꽤 그럴듯해 보였는지 지나가던 한 무리의 가족이 발걸음을 멈추고 빠에야 솥 앞을 기웃거렸다. 그들은 요리사의 눈을 피해 내게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음식 어때요? 맛있어요?”라고 물어봤고, 나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똑같이 입모양으로 응답했다. 그 가족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 없이 “조언 고마워요.”라 말하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두 여학생이 나보다 먼저 그릇을 비우고 그 자리를 떠났고, 나는 혼자 남아 성실하게 빠에야 그릇을 비운 뒤 악귀라도 털어내듯 쓰레기통에 그 종이 그릇을 내팽개쳤다. 그 하찮은 퇴마식(?)을 치르고 나는 노팅힐 서점으로 향했다.
노팅힐 서점은 포토벨로 마켓 메인 스트리트에서 옆골목으로 살짝 빠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생각보다 무진장 작은 공간이었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윌리엄의 서점과는 꽤 다르게 생겼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서점 ‘The Travel Bookshop’은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진 가상의 서점 세트장이며 그에 영감을 준 서점이 다름 아닌 이 ‘The Notting Hill Bookshop’이라고 한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이 동네는 물론이고 노팅힐 서점을 찾는 방문객들이 많아져 하나의 관광 명소가 되어 버렸는데, 이 서점은 분명한 명실상부 ‘서점’이기 때문에 절대 소란을 피우거나 과한 사진 촬영 등으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다행히 사람들이 서로 민폐가 되지 않게 차분히 서점을 둘러보고 있었고, 덕분에 불편함 없이 차분하게 책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는 서점을 모두 둘러본 끝에 북토트백과 ‘Blind Date with a Book’을 샀다. Blind Book은 말 그대로 구매자가 안에 어떤 책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주인장 추천 컬렉션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종이 포장지로 싸여있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책을 설명하는 키워드를 몇 가지 적어두어 구매자로 하여금 취향이나 목적에 가까운 책을 블라인드로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맨 처음 제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말 기발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당장 포장지를 뜯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카페에 가서 좀 더 경건하게 개봉식을 치르고자 꾹 참았다.
단순한 관광지⋅포토스팟이 아닌, 작지만 정말 제대로 된 서점이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영화 <노팅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물론 나는 영화 노팅힐의 내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서점투어가 좋아서, 그리고 노팅힐 속 분위기가 예쁘고 좋았어서 포토벨로 마켓 일정을 계획하며 함께 넣은 일정인데 생각보다 더 좋았다. 노팅힐 서점의 시그니처 로고와 색깔이 멋지게 드러난 외관 앞에서 기념사진도 남긴 후, 나는 발그레해진 두 뺨에 미소를 가득 띠고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룰루랄라 걸었다.
*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 : 런던의 노팅힐 지역에 위치한 마켓으로 버러마켓, 캠든마켓과 함께 런던 3대 로드마켓으로 손꼽힌다. 긴 포토벨로 로드(Portobello Road)를 따라 열리는 이 시장에서는 여러 종류의 골동품(앤티크 물품) 및 중고품, 빈티지 의류 및 디자이너 의류, 신선한 농산물을 비롯한 갖가지 식료품, 길거리 음식 등 매우 다양한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