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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Sep 08. 2024

[16] 테이트모던, 미지와 이지의 영역을 넘나드는 곳

런던여행기_테이트모던




북적북적 사람들 사는 정겹고 활기찬 냄새와 따뜻하고 푸근한 겨울의 빛깔로 가득한 버러마켓(Borough Market)에서 나오니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두운 쪽빛이 하늘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계획에 없었던 크럼블 가게에서 줄을 너무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 눈 깜짝할 새 어느덧 오후 네시경이 되어 버렸다. 버러마켓에서 재회했던 R과 또다시 작별인사를 나눈 뒤, 나는 서둘러 테이트모던(Tate Modern) 갤러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버러마켓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는 했지만 테이트모던의 폐장 시간은 18시였고 나는 뚜벅이였기에 서둘러 가지 않으면 관람도 못 하고 쫓겨나야 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짙은 감색으로 에워싸인 런던 거리 위를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하지만 애석하다 해야 할지, 즐겁다 해야 할지,... 테이트모던을 비롯하여 이곳 뱅크사이드에 자리하고 있는 건축물들은 모두 눈길을 사로잡는 감각적인 외양을 지녔기에 나는 잰걸음하는 동안에도 사방팔방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고, 시간 여유가 없어 이 거리 위를 빠르게 휙휙 훑고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내 어깨 위에 돌처럼 얹었다.

Tate Modern Gallery 가는 길.


어쨌든 나는 오후 4시 40분쯤 겨우 테이트모던에 당도할 수 있었고, 게이트에서부터 천장을 장식한 조형물 등을 구경하느라 거의 17시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전시장 내부에 들어섰다. 내가 방문한 당시에는 무료 상설전 외에도 유료 특별전으로 Yayoi Kusama전, Philip Guston전, 아프리칸 사진전인 A World in Common 등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내가 알기론 유료 특별전의 경우 사전예약이 필요했고 더군다나 나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상설 전시장으로 곧장 이동했다. 테이트모던은 회화, 조각, 설치 미술, 미디어아트 등을 아우르는 근현대미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높은 소장가치의 우수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어 런던을 방문한다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미술관 중 하나다. 그러한 곳일진대 예상치 못하게 시간이 촉박해진 탓에 약 한 시간 정도밖에 둘러보지 못하여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하여 나는 1년 만에 다시금 런던을 방문할 계획을 수립 중이다…)

입구에도 여러 설치미술 작품들이 있다.


흐르는 세월 동안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미술의 방향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현대미술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실제처럼 재현하여 그 기교와 정교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보다는 점차 작가 자신의, 또는 세상의 어떠한 보이지 않는 소리나 무언가를 다양한 방식을 이용하여 은유적 또는 직유적으로 표현하고 사람들의 내면 보다 깊은 곳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일은 고전미술을 감상하는 일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해 주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심리상태에 따라 유동적이고도 가변적인 감상을 안겨준다. 런던을 방문했던 지난겨울의 나는 심신이 몹시 지쳐있는 상태였고 정확히 서술할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의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져있었기에 테이트모던에서의 시간은 내 내면 깊숙한 곳을 자극하기에 충분, 아니 가득차고도 넘쳤다. 작가들 저마다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메시지로 가득 메워진 이 공간 속에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사유의 발걸음을 내디뎌 나갔고, 고작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작품을 통해 수많은 작가들의 고민과 생각을 함께 공유하며 덩달아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작품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이고 내게 영감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중 특별히 더욱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면, Sarah Sze의 ‘Seamless’와 Alexander Calder의 ‘Stabile’다. 지금 이 시점에서 또다시 테이트모던을 방문한다면 최애 작품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저 작품들이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테이트모던의 전시 소장품들로 무엇이 있는지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 ‘나’의 여행기에는 온전히 나의 주관적인 감상만을 서술하겠다.)

<Stabile> by Alexander Calder
<Seamless> by Sarah Sze


한참 작품을 감상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려고 관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였다. 여행동안 먹은 것들이 소화가 잘 안 되었는지 속도 안 좋고 몹시 고단했다. 나는 잠시 찬 바람을 쐬고자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로 나가니 예상치 못한 기막힌 야경이 펼쳐졌다. 발 바로 밑에는 템즈강이 달빛과 도시의 불빛을 받아 밤하늘 아래에 별 수 놓인 또 다른 밤하늘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건너편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고풍스러운 돔이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우아한 자태로 듬직하게 서 있었다. 밤의 테라스에 기대어 서서 이 야경을 바라보는 순간동안 내게 매우 짙은 고독감과 편안한 해방감, 그리고 내 주변을 둘러싼 이 세상의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의 푸근함이 동시에 물밀듯 밀려왔다. 서로 다른 성질의 여러 감정들이 해일처럼 나를 덮쳐와 잠시동안 오묘한 미지의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길 잃은 우주 여행자 앞에 나타난 셰르파처럼 곧 문 닫을 시간을 알리는 안내가 나를 깨웠고, 나는 미지의 존재에서 순식간에 이지의 존재가 되어 테라스에서 벗어났다. 이지의 나는 미술관을 나서기 직전에 들른 화장실 앞에서 무아지경으로 열렬히 키스 중인 한 연인을 맞닥뜨렸다. 이들의 행위는 이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표현된 애정이라는 예술 형태인 걸까 싶었고, 한편으론 이들의 원초적이고 자유로운 행태가 얼떨결에 나를 억울한 이방인처럼 만들었다.


내게 여러모로 매우 신비롭고 웅숭깊은 경험을 선사해 준 이곳 테이트모던에서의 시간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 기억 속 ‘특별함’의 방에 자리잡은 이 테이트모던, 다른 누군가에는 또 어떠한 경험을 선사했을까.











*테이트모던 (Tate Modern)

 : 영국 런던 뱅크사이드에 위치한 현대미술 갤러리로, 대중적으로 유명한 근현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과거 화력발전소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졌으며, 테이트모던이 위치한 이 지역 역시 과거에 낙후되어있던 곳이 미술관 건립과 더불어 문화적인 명소로 발전하게 되어 지역 개발의 좋은 사례로써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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