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gner | Tannhäuser, Act 1: Overture
바그너의 악극을 각별하게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바그너의 악극에서 느낄 수 있는 그만의 매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오페라 부파보다는 세리아를 더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서도 바그너의 악극은 꽤 매력적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악극)들이 아직 오페라가 대중적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무대에 올려지는 기회가 몹시 드물어 나뿐만 아니라 바그너 오페라를 보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그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국립오페라단 주관 하에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접하였으니 매우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귀에 익숙한 서곡과 함께 <탄호이저>의 막이 오르자 그간의 오랜 갈증에 대한 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를 감동적인 무언가가 가슴 안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가정 오디오 음향이 아무리 좋더라도 실연이 주는 감동과 몰입감은 확실히 크다. 또한 감상에 있어 시각적인 비중이 높아지니 확실히 이야기 흐름과 인물의 감정선에 더 집중하게 된다. <탄호이저> 속 주요 등장인물인 탄호이저, 베누스, 그리고 엘리자베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생각하며 극을 감상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다.
‘사랑’이란, 육체적 쾌락을 통해 맛볼 수 있는 달콤함이라 부르짖는 탄호이저 캐릭터는 당대의 낡은 예술 사조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쾌락을 한 번 맛보고 나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하고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요즘에는 ‘도파민’이라는 단어가 대세 키워드로서 확고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현대 사회와 쾌락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쾌락 중독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이 쾌락은 에로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범주에서의 온갖 쾌락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극 중 베누스베르크를 탐하는 탄호이저를 보며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팜므파탈을 대변하는 베누스 캐릭터와 성녀를 대변하는 엘리자베트 캐릭터는 각자 다른 두 명의 독립된 인물로서 극 중에 등장하며 탄호이저를 사이에 두고 대립 관계에 놓여 있지만, 어쩌면 그 당시 여성(뿐만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도 해당될 수 있겠다)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던 외부적 가치관과 그들 스스로 내면에 품고 있던 내부적 가치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러저러한 천신만고 끝에 로마 교황의 나무 지팡이에 잎이 피어나 탄호이저는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미 엘리자베트도, 탄호이저도, 베누스도 모두 죽어 버렸다. 세 가지 유형의 캐릭터가 모두 죽는 <탄호이저>의 결말은 많은 생각에 잠기도록 하는 재미를 준다.
이번 공연의 오페라 가수들의 역량도 모두모두 좋았고 오케스트라 연주 또한 (감명 깊지는 않지만) 거슬리거나 부족한 바 없이 무난하게 좋았으며, 고전과 현대 그 사이 어딘가의 시대적 배경이나 무대 구성도 신선하고 좋았다. 하지만 공연 내내 무대 위를 누비며 클로즈업샷 등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의 존재, 그리고 무대 위에 나란히 띄워진 큰 크기의 화면으로 동시 송출되는 영상의 존재, 이 두 가지는 오페라에의 몰입을 방해했다. 분명 연출자의 확고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인물들의 심리를 영상을 통하여 다층적으로 깊이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음악 그리고 객석에서 보이는 무대 위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의 심리를 굳이 이처럼 필요 이상으로 더 드러내어 보여주어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대에만 집중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영상으로 시선이 감으로써 시선도 분산되고 집중력도 분산되어 나에게는 산만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대 예술을 보러 온 것이지 영상 예술을 보러 온 것이 아닌데 왜 여기에서까지 영상을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분명 혁신적인 연출이었음에는 동의하겠으나 그것이 좋은 연출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를 통해 더욱 풍부한 감상을 선물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감상은 반감되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탄호이저> 공연. 앞으로도 더 많은 작품들, 좋은 공연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