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변질된 그 이름, 조기 교육

by 아리스

아기는 다른 장난감보다 바스락거리는 헝겊책을 더 좋아했다. 헝겊책을 물고 빨던 아기는 앉을 수 있게 되자 딱딱한 보드북을 곧잘 봤다. 플랩북을 마구 찢어가며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며 찢어진 책만큼 가슴이 아팠지만 책을 잘 보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형 브랜드 전집은 일반 전집보다 두 배는 비쌌다. 그에 딸린 교구들은 기본 단 위가 백만 원부터 시작했다. 영업사원의 꾐에 넘어가 샀던 브랜드 전집의 관계자들은 비싼 교구와 전집에 비하면 수업료는 거저라며 '영재로 자라나는' 수업을 권유했다. 다들 수업을 받고 싶어서 책과 교구를 사는 거라고 했다.


그렇게 두 돌 무렵 과외를 시작했다. 전집 회사 소속의 교사는 일주일에 두 번씩 집으로 와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교구로 독후 활동을 이어나갔다. 매주 선생님은 아이 앞에서 일명 '만들기 쇼'를 보여주셨다. 아직은 거창한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아이 대신 만들기를 손수 보여주셨고, 아이는 선생님의 만들기 활동을 관람했으리라. 만들기 쇼를 마치고 나면 아이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처럼 피드백을 안겨주셨다. 이 수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면 내 아이의 미래는 보장받는 것 같았다.


일명 독박 육아 중 과외 시간만 되면 40분 동안은 해방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생아였던 둘째 아이가 있었지만, 온전히 둘째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둘째가 잘 때면 여유롭게 티타임도 즐겼다. 첫째 아이도 나도 수업시간을 기다렸고, 주 2회의 40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달콤했다.


1년이 지났다. 300만 원의 전집과 교구값 그리고 매달 15만 원의 수업료의 지출이 있었다. 수업을 연장하려면 새로운 전집을 구매해야 했다. 전집은 대략 60만 원이었고, 둘째까지 수업을 받으려면 그 부담이 상당했다. 계산기를 두들기며 미래를 그려보는데 앞이 까마득했다. 벌써부터 교육비 지출이 이만하다면 파산의 길로 가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고작 아이들은 세 돌과 한 돌이었고 뱃속에는 이제 막 생겨난 셋째도 있었다.


수업과 브랜드 전집 구매를 멈췄다. 브랜드 전집이 헌 책방에서는 10분의 1 가격에 팔리고 있는 현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 삶에서 거품을 천천히 걷어갔다. 아이는 엄마와 책을 읽고 엄마와 교구로 놀아도 충분했다. 제정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수업을 연장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 수업도 엄마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미디어에서 조기 교육을 받는 아이와 그 부모들은 나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이는 아이답게 커야 한다며 혀를 끌끌 차며 봤던 조기 교육을 내가 감행했을 줄이야 미처 몰랐다.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아이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다는 그 끈적한 유혹에 내가 넘어갈 줄은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브랜드 전집과 수업이 유일한 줄 알았는데, 시선을 돌리니 무궁무진했다. 아이는 선생님의 만들기 무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와 같이 만드는 교구를 더 좋아했고, 어설퍼도 스스로 만드는 시간도 즐겼다. 비싼 브랜드 전집을 잘 읽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냥 책을 좋아했다. 엄마의 무릎에 앉아 엄마가 읽어주는 책이면 어떤 책이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간 지출한 몇 백만 원의 책 값과 수업료는 아깝지만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다행라며 나를 위로했다. 이 또한 인생의 수업료라 여기며 아이를 키우며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차고 결혼을 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얻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세웠던 신념에도 '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고,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브랜드 전집의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그 세계는 신비롭고 엄청난 것들이 있다고 어림짐작하며 내내 수업받지 못함을 후회하고 자책했으리라. 막상 받아보니 별거 아니었고, 돈만 날린 셈이지만 얻은 것은 분명 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교육자가 아닌 '마케팅'에 특화된 영업사원이라는 것을. 엄마의 신념이 더 단단해질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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