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VIP

by 아리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생긴 이후에도 으레 데이트하던 코스대로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면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백화점 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 식당 근처에 어린이 서점이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책에는 관심이 없던 나와 다르게 쇼핑과 다방면에 관심이 많던 남편은 귀도 얇아서 어딜 가나 영업사원들이 좋아하는 준비된 충성 고객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남편은 어린이 서점에서 상담을 받았다면서 나에게 권유받은 전집을 추천해 줬다. 나는 분명 관심이 없었는데 '아이에게 좋은 것'이 '교육적'이라는 명목하에 고가의 전집을 두 질이나 구매했다. 그것은 작은 불씨에 불과했다.


아이가 비싼 책을 잘 읽었다. 사실 그저 '책'을 잘 읽었던 것뿐인데, 나는 비싼 책을 잘 읽는다고 착각했고 이와 같은 착각은 브랜드전집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브랜드전집을 사기 전 돌 무렵 샀던 국민 아기 전집으로 미취학 시절을 보내려고 했었던 계획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이가 책을 잘 읽으니 자주 어린이 서점에 들렀고 어린이 서점의 영업사원은 나를 '미래를 선도하며 아이를 누구보다 잘 키우는 위대한 엄마'처럼 대접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연쇄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책을 놓을 곳이 없어서 책장을 구매했고 책장을 놓을 공간이 없어서 거실의 티브이와 소파를 치웠다. 거실의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나서도 책에 대한 욕망은 끝나지 않았다.


전집을 구매할수록 나는 아이를 더 사랑하는 엄마가 되는 것 같았고, 영업사원들은 그런 나를 '인정'하고 떠받들었다.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도 모를 책 구입과 책 읽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아이가 책을 잘 읽어서 가능한 패턴이었지만 이와 같은 소비에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소비가 주춤할때면 그간 내 지갑으로 신뢰를 이어온 영업사원들은 달콤한 판촉물을 건네주며 새로 나온 전집과 시기별로 필요한 전집들을 나열해줬다. 어느 영업사원은 4살 무렵의 내 아이에게 발달이 빠르다며 초등 3학년 이상에게 권장하는 인물 전집을 추천해 줬다. 나는 또 어리석게도 그 꼬임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발달이 빠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 제 이름만 겨우 읽을 줄 아는 수준이었으니 요즘 같은 시대에 발달이 느린 편이 맞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검은손인 줄 모르고 덥석 잡았던 것이다.


주관이 뚜렷한 편이고, 냉철하다고 자신을 판단했던 나였다. 영업 사원들에게 영업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장사에 눈먼 그들을 나는 내 아이의 교육 멘토라고 생각하며 신뢰했고 그들은 내가 소비를 한동안 멈추자 더 이상 나를 추종하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전집을 사모으다 보니 두 곳의 백화점에서 등급이 승급되었다. 멈췄던 소비는 다시 불씨가 붙었다. 거리에서는 평민이던 내가 백화점에만 가면 귀족이 된 것 같았다. 백화점 주차장에는 내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고 차량 앞 유리에 붙어있던 반짝이는 VIP 스티커 두 장은 나는 일반인과 다르다는 오만함에 가뒀다. 비싼 커피를 더 이상 사 먹지 않아도 백화점에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라운지에서 고급 커피를 공짜로 마실 수 있으니 자아도취에 흠뻑 빠져있었다. VIP라고 별도 혜택이 더 들어가니 소비는 더 진해졌고, 아이를 위한 최고의 씀씀이를 보여줬다. 마치 인형놀이 하듯 아이를 화려하고 값비싼 것들로 꾸미고 사랑이라고 오인했다.


소비에 제동을 걸만한 제 3의 요인이 분명히 필요했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유일한 취미인 독서를 했다. 구독중인 전자책 서가에서 우연히 접한 존리의 서적 하나가 나를 심하게 꾸짖었다.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제까지 철없이 굴었냐고 자책하는 시간마저 아까운 기분이었다. 이어서 존리 대표의 저서들을 줄줄이 이어나갔고 철없던 소비 습관을 반성하고 각성했다. 나를 이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해 준 존리 대표에게 감사하며 씀씀이를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던 쇼핑센터와 백화점부터 끊었다. 갑자기 생활 패턴을 바꾸려니 쉽지만은 않았다. 고가의 브랜드 전집만 정가에 구매했던 내가 중고마켓에서 무료 나눔으로 책을 얻어오기도 하고, 중고 서점에서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의 전집들을 사기 시작했다. 고가의 의류가 아니면 아이에게 입히지 않았는데, 물려받는 옷을 입기 시작하자 소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이는 저렴한 중고 책이어도 엄마가 읽어주는 책이면 좋아했다. 고가의 옷을 입힐 때는 행여 옷에 뭐라도 묻을까 조바심을 느꼈는데 물려받은 옷을 입히니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아도 마음이 가벼웠다. 한결 밝아진 엄마의 얼굴을 본 아이도 전보다 편했으리라. 아이에게 최고의 것은 값비싼 물건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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