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 나면 조리원에 가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것처럼 돌 무렵 된 아기의 어린이집 입학은 학령기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 되었다. 생후 100일 무렵의 아기들도 어린이집에 다닌다고 하니, 위탁 육아는 바빠진 현대 여성들에게 빠질 수 없는 사회적 통념이 된 것이다. 아기를 낳기 전부터 위탁 육아에 대한 나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주양육자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아야 할 아기들이 여러 사람들 손에 맡겨져서 퇴근할 엄마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안쓰러웠다. 현실이 참 팍팍하다 느꼈다.
임신을 하면서 나는 일을 그만뒀다. 업종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요가를 지도했고 밤에는 치킨과 맥주를 파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했었다. 요가와 새벽에 일하는 요식업은 임산부가 하기 버거운 업무였고 자연스럽게 하던 일들을 정리했다. 살림은 빠듯했지만 엄마가 아기를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출산 후 마땅히 돌아갈 직장도 없었다.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돌보는 일은 나의 주 업무가 됐다. 육아와 살림을 하는 전업맘의 삶은 내가 상상했던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엄마들끼리 카페에 모여 우아하게 티타임을 갖고 쇼핑을 즐기는 모습은 허황된 시나리오였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일상이 매일 반복됐다. 남들은 다 앞으로 전진하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도태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남편은 힘들면 가정부라도 쓰라고 편한 소리를 했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면서 주 업무였던 살림에 외주 인력을 쓰기는 싫었다.
아기를 온전히 바라보고 사랑하는 일은 힘들지만 보람되고 뜻깊었다. 아기가 돌 무렵 되자 친정 엄마와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라고 다그치셨다. 다들 그렇게 키운다며 유별나게 굴지 말라고 하셨다. 시댁에서는 계약직 이력서를 갖다주셨다. 시어머니는 그 옛날에 출산 한 달 무렵부터 일을 하셨다며 엄마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셨다. 아기가 돌이 지났는데 어린이집을 안 보내고, 나도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돌보는 게 마치 큰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마치 일하기 싫어서 아기를 데리고 있는 것처럼 왜곡된 시선은 나를 숨 막히게 조여왔다.
나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놓은 육아 절차를 밟고 싶지 않았다. 돌이 지난 아기는 아직도 미숙하고 엄마의 손길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 무엇보다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은 정서적 안정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어린이집은 불필요한 기관이었다. 엄마의 품을 그 무엇보다 좋아하는 아이에게 상실감을 줘가면서 얻어야 하는 것이 사회성이라면 필요 없었다. 사회성이 뭐라고 조기에 주입해야 할 성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사회성은 어린이집에 돌 무렵 가야만 발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돌 무렵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엄마의 사랑과 애착이면 충분했다.
돌아갈 직장이 있다면 모를까, 계약직으로 출퇴근하면서 아이를 위탁 보육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버는 돈은 온전히 위탁 보육료로 들어갈 것이 뻔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까지 돈 몇 푼 벌고 싶지 않았다. 돈이 문제라면 그만큼 '내가 더 아끼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뱃속에 둘째가 생겼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이력서를 내밀던 시부모님의 손길을 거절할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마음 편하게 '전업맘'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또래 아이들은 사회성 발달을 위해 어린이집에 있을 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 활동을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 중 한 명은 꼭 물어봤다. "오늘 어린이집 왜 안 갔어?" 처음엔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했지만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고, 얘기가 길어지는 것이 피곤해서 그냥 둘러대고 말았다.
집에서 보육한 아이들은 콧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랬다. 어린이집에 보내면 365일 중 360일은 콧물을 달고 살게 될 거라고. 아이들은 병원 차트조차 만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삼시세끼 따뜻하고 건강한 집 밥을 해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마다 등원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평화롭게 하루를 시작했다. 시간에 구속되어 아이를 다그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아이의 속도대로 맞추니 나도 부족했던 인내심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와 하루 온종일 보내는 시간은 귀하고 소중했다. 아이의 모든 것을 함께할 수 있어서 벅찬 시간이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니 딱 하나 단점은 분명했다. 바로 엄마의 '자유 시간'이다. 나만의 온전한 시간은 잠시 뒤로 미룬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낳았으니, 싫든 좋든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대단하다'는 대부분의 시선 사이로 혹자는 '아이가 불쌍하다'고 얘기했다. 주위의 시선은 상관없었다. 나는 나와 내 아이를 믿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아이를 집에서 돌보는 것은 이상한 행위가 아니라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