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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Mar 09. 2024

자매

 "언니. 큰언니. 나야 막내. 많이 춥지?" 하루 종일 서있느라 피곤했던 나는 옆에서 속삭이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듣나서야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매무새를 고치일어서려는데, 힘없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늦은 시간까지 네가 고생이 많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고, 그저 먼 친척이겠거니 생각했다. 검은색 한올 없이 새하얀 머리와 심하게 굽은 때문에 그녀는 얼핏 봐도 구십은 족히 넘어 보였다. 할머니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아들로 보이는 남성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영정사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려서 슬로비디오를 보는 느낌이었다. 영정사진 앞에 도착한 할머니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어루만지듯 정성스럽게 그걸 쓰다듬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남성에게 향을 피워 올리라고 지시했다. 남성은 아무 말 없이 향 하나를 집어 불을 붙이고 향로에 꽂았다. 할머니와 남성은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그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서 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 번 더하라는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고인에게 총 세 번의 절을 올렸다. 남성과 맞절하는 순간까지도 난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앉아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어쩐지 많이 닮은 느낌이 들었다.

 "널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40년이 넘었구나. 언니가 간간이 네 소식을 전해줬어. 잘 살고 있다고. 내가 누군지 알겠니?" 난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네가 아장아장 걸을 때 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난 이모할머니란다. 이쪽은 네 삼촌뻘이고." 삼촌은 약간 어눌한 말투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늦었다는 설명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벽을 바라보니, 시계는 새벽 1시 2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연히 그 시간에 조문을 올 사람은 없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고 있었다. 바닥에 얇은 이불을 깔고 자다가 등이 배겨서 내가 일어나지만 않았으면, 아무도 이모할머니와 삼촌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척이라곤 하지만 접점이 거의 없는 우리는 몇 분간을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삼촌이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고 빈소 밖으로 나가자, 나는 이모할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이모할머니는 외할머니의 임종이 어땠냐고 물었다. 사실 난 전날 퇴근 무렵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고, 엄마가 너무 심하게 흐느끼는 탓에 뭘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와서 정신없이 조문객들을 상대한 후였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피곤한지 이모할머니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연신 얼굴을 비볐다. 난 눈치를 보다가 엄마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언니가 오른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알고 있니?" 돌아가시기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져서 휠체어를 이용했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다리를 절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기억 속에 할머니는 언제나 오른쪽으로 절뚝이며 걸었다. 마치 한쪽 다리가 자란 듯이.

 "그 시절이야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로 못 살았지만, 우리 집은 특히나 더 가난했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이 부족하게 느껴졌을 정도니까 말이야. 아마 언니가 열넷 내가 아홉 살쯤 되었을 무렵일 거야. 언니와 나는 어떤 일본인 부부의 집에 식모로 팔려가게 되었어. 상상이 가니?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국민학생인데. 원래는 언니 혼자 가는 거였는데, 날 끔찍이 아끼는 바람에 같이 가게 된 거지. 난 너무 어려서 심부름 정도만 하고, 모든 일은 언니가 도맡아서 했어. 언니는 맞이답게 손이 빨랐어. 주인아줌마가 시키는 모든 일을 막힘없이 척척 처리했으니까. 처음에는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게 슬펐지만, 곧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어. 언니랑 있으면 최소한 밥은 굶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식모로 팔려온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어. 하지만 그 집의 땔감은 언제나 수북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주인아줌마는 우리한테 한 번도 모질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자식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잘 챙겨줬지. 가만 보자,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정월대보름 무렵이었을 거야. 아침부터 많은 눈이 내렸지. 주인아저씨가 장터에서 팥죽을 한 그릇 사다 줘서 언니랑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언니가 내 코를 만지더니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어. 난 영문을 몰라 언니를 멀뚱멀뚱 쳐다봤지. 언니는 검지손가락을 쭉 펴더니 아궁이 옆에 놓은 검은 물체를 가리켰어. 그리고 그게 연탄이라는 건데 나무보다 뜨겁고 오래 가는 거라고 말했어. 연탄 만진 손으로 동생 얼굴을 망쳐놨으니 웃길 만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세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던 시절인데 뭐가 다르겠니? 그저 어린 여자애들 둘이서 배가 부르니까 마냥 행복했던 거야. 평소 같으면 피곤해서 바로 곯아떨어졌을 언니도 그 날 만큼은 내가 잠들 때까지 오랫동안 머리를 쓰다듬어줬어. 아주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말이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어. 그리고 난 이상한 곳에 누워있었지. 눈앞에 언니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내가 언니를 부르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어. 난 영문을 몰랐지. 분명 언니랑 둘이 팥죽을 먹고 잠들었는데 처음 보는 곳에 누워있었으니 말이야. 언니는 나를 부둥켜안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내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주인아저씨랑 처음 보는 어른들도 곁에 있었는데,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어. 그땐 그저 철없는 어린애였으니까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게 마냥 좋았던 것 같구나. 하지만 곧 언니의 오른쪽 발을 보고 깜짝 놀랐어. 하얀 버선이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니 말이야. 어른들이 빨리 치료를 받으라고 말해도 언니는 막무가내였어.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며. 지금부터는 다음 날 옆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오빠한테 듣게 된 얘기란다. 전날 자정 무렵 주인아저씨가 이상한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깼는데, 방안이 연기로 가득하더래. 서둘러 주인아줌마를 밖으로 내보내고 우리를 깨우러 왔는데, 언니와 내가 축 쳐져서 의식이 없었다는구나. 주인아저씨가 급하게 옆집 오빠를 깨워 돌아왔을 때 잔뜩 겁에 질린 언니가 내 머리맡에서 울고 있더래. 그때 누군가 동치미 국물을 먹여야 한다고 했고, 언니는 나를 둘러업고 옆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가끔 옆집에서 일손을 돕곤 해서 담가놓은 동치미가 있다는 걸 알았나 봐. 아까 내가 그날 유독 눈이 많이 왔다고 얘기했었나? 아무튼 눈이 눌어붙어 장독대 뚜껑이 열리지 않자, 언니는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지. 그런데 그게 주먹으로 친다고 깨지겠니? 결국 옆집 오빠와 번갈아가며 발로 차기 시작했고, 장독대가 깨지면서 큰 파편이 언니 정강이에 깊게 박혔다는구나. 언니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손으로 동치미 국물을 퍼서 내 입에 부어줬어. 그것 때문에 깨어난 지는 모르겠다만, 어린 언니가 나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니 지금도 너무 미안하구나."

 잠시 말이 없던 이모할머니는 언니의 영정사진을 보며 훌쩍였고, 수분이 다 말라버린 듯한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왔다. "언니 빨리 못 와서 미안해. 하루만 더 살지 그랬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곧 갈 거니까 거기서 만나." 어느새 돌아온 삼촌은 흐느끼는 이모할머니를 감싸 안고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삼촌의 어깨에 쌓인 눈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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