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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Mar 04. 2024

서랍

과거.현재.미래

   오후에 커피 몇 모금을 마셔도 잠들기가 어려운 나이다. 새벽에 한 번씩은 깨고  곧 잠이 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이 생각 저 걱정이 밀려오며 아침을 맞는다. 밖을 내다보면 낮 동안 번잡했던 집 앞 사거리도 파장한 시장처럼 쓸쓸하고 간혹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면 거리는 깊은 바닷속처럼 조용하다.

동이 트려면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되고 배는 고파진다. 우유 한 잔을 데워 마시고 무얼하며 동 틀 때까지 기다리나? 생각하면 영락없이 떠오르는 일이  ' 그래! 서랍정리나 하자.'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취미는 서랍정리이다. 기분이 좋을 때보다는 우울할 때, 심심할 때 서랍을 정리한다.

부엌서랍, 옷서랍, 책상서랍, 약서랍 등...., 그렇다고 늘 반듯이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갈퀴손인지 정리해 놓아도 금방 흐트러지는 서랍을 보면 숙제가 쌓여있는 느낌이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던 코로나19를 겪으며 하도 답답한 마음에 집안을 정리하다 보니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홀로 깨어있는 새벽.

소음 없이 할 수 있는 게 서랍 정리이다. 바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서 조심조심하면 아랫집에 피해를 주지 않고, 하다 보면 발그스름한 동이 터온다. 특별히 새벽의 서랍 정리는 나에게는 명상의 시간이다.


서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예전에 색깔에 반해서 덜컥 사놓은 옷, 입을 때마다 기분 좋은 옷, 조만간 봄바람이 살랑거리면 입어야지 하면서 기대하는 옷들이 앉아있다. 그 옷들을 이렇게 말았다가 저렇게 개었다가 다시 정리하다 보면 버릴 옷과 입을 옷을 나누는 것처럼 심란한 생각들이 정리가 된다. 최근 몇 달을 고민 속에 빠져 있다가 헤어나는 중이다. 칙칙하고 무겁고 철 지난 겨울옷을 봄에 입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고민과 다름이 없었다. 도저히 맞지 않을 옷을 언제가 입으리라고 보고 또 보는 것처럼 시간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근래 어느 책을 읽다 보니 주인공의 마음속의 독백이 나에게 꽂혔다. 바리스타로 일하며 앞날을 걱정하는 주인공은 어느 날 깨닫는다 ‘한 시간의 미래, 두 시간의 미래, 그것도 아니면 하루라는 미래. 통제 가능한 시간 안에서만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지기로 했다. 1년 후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를 알 수 있는 건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니까...’

이 독백이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내가 SF영화의 주인공이 아닌데 어떻게 과거와 미래를 돌려놓을 수 있겠는가.


 옷을 정리하며 몇 년 동안 입지 않았던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마음먹지만 역시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옷 욕심보다 묵은 기억과 소용없는 후회를 꺼냈다 집어넣었다 하는 내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어제도 옷 정리를 하며 버리려고 내놓은 하늘색 조끼를 오늘은 다시 옷장에 넣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조끼를 끄집어냈다. 내일 아침 외출을 하며 의류수거함에 넣어버려야지. 그럼 미련도 없어질 것이다. 보풀이 나고 색이 바랜 옷들은 내 서랍에서 퇴출이다. 작아져 입지도 못하고, 유행이나 나이에 맞지도 않으며 희망 고문하는 옷들도 퇴출이다. 새벽 두어 시간 정리하니 이제 서랍은 헐빈하고 여유롭다. 옷과 내가 심호흡을 한다. 신선한 바깥공기를 맡는 것만이 심호흡이 아닌 것을 느낀다.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 이것이 현재에 집중해야 할 내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해 본다. 아침노을이 오늘따라 더욱 정열적이다.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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