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놀이터를 가면 미끄럼틀부터 갈 때가 많았다. 혼자서도 쉽게 할 수 있어 좋았다. 계단을 올라가 앉기만 하면 된다. 짧은 몇 초지만 내려오는 동안 재미있다. 그런데 그 몇 초를 위해 올라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내려오기는 좋은데 올라가기가 싫다. 올라가지 않고 내려갈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몇 초의 재미를 더 끌어올리자!'라며 일어서서 탄다. 균형을 못 잡고 쓰러져 다친다. '그렇다면 올라가는 시간을 줄이자!' 내리막을 거꾸로 올라간다. 미끄러진다. 신발 밑창이 많이 닳아 있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운동화를 사주셨다. 새 운동화다. 너무 좋았다. 이젠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올라가는 것 자체가 싫다. 결국 미끄럼틀은 잘 안타는 놀이기구가 되었다.
새 운동화를 신었다. 새 운동화가 생길 때면 학교를 다녀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1. 걸레를 쥔다. 2. 운동화를 닦는다. 3. 닦고 또 닦는다. 목표는 새것으로 만들기였다. 안 닦이는 흙이라도 묻어 있으면 마음에 짜증이 난다. 짜증을 지우려 운동화의 흙을 지우고 지운다. 그러나 이미 난 헌 것이 되어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올라가기가 싫듯 헌 것이 되는 느낌이 싫었다.
무엇이 날 그토록 싫은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게 했을까?
난 싫은 느낌을 거부하는 성향이 너무 강하였다. 급기야 난 그 느낌을 안 받기 위해 좋은 느낌 쪽으로 깊숙이 도망가는 성향까지 강해졌다. 심지어 싫은 느낌을 떨쳐버리려 쓸모 있음을 쓸모없음으로 바꾸려는 성향이 싹텄다. 운동화에 흠집이라도 나면 난 쓸모 있음을 없애려고 바로 헌신짝 취급하고 일부러 막 구겨 신었다. 이런 내 성향과 행동들이 정리된 나 사용설명서를 만들었다.
내 성향과 행동
1. 싫은 느낌을 강하게 거부할 때
① 싫은 느낌 피해 다니기
거짓말. 중독. 얼버무리기. 무책임. 변명. 핑계
② 좋은 느낌 방향으로 도망가기
거짓말. 중독. 소극적 협박. 허언. 쾌락추구.
③ 싫은 느낌 망가뜨리기
거짓말. 합리화. 허풍. 척. 막말. 탓
(출처: 이 별난 사용설명서 중)
씁쓸한 결과이다. 어쩌겠나. 사실인 걸. 그리고 난 이런 결론에 다다랐다. 난 늘 이 말을 하고 있었다.
" 날 건드리지 마! "
세상엔 왜 나 사용설명서가 왜 없던 거야?
사용설명서가 없던 그때 내 성향대로 행동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문제는 난 끝없는 내리막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끝없이 파고 파서 내리막을 길게 만들었다.
미끄럼틀은 말했다.
1.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달라!"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라는 말을 재해석한 건 내가 판 내리막 끝에 도착할 때였다. 이 말은 나에겐 희망고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롤러코스터는 당연히 튀어 오른다는 것을 말이다. 낮은 확률의 기계 흠이 없다면 튀어 오른다. 심지어 안전하게 오른다.
인생은 어떻게 튀어 오르지?
2. "지구는 중력 스위치를 OFF 안 해!"
이 지구에 파고 팔 땅은 넘치고 넘쳤다. 그 끝은 지구핵이다. 지구가 나를 위해 중력을 끄지 않는 한 인생이 당연히 튀어 오르는 기적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가 서있는 위치와 장소마다 지구핵 위치도 다 달랐다. 직장 내에서, 인간관계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등등. 행동에 따라서도 다 달랐다. 말할 때, 운동할 때, 친구 만날 때, 일할 때, 놀 때... 등등.
내 성향이 어디 가겠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내 본성일 텐데 말이다. 난 올라가기 싫어하는 성향이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임을 이젠 안다. 그래서 난 이 별난 사용설명서를 외워버렸다. 그 행동들을 하고 있다면 일단 멈추고 내리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방향을 선택한다.
조금 더 팔까? 그만 파고 올라갈까?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
3. "그 내비게이션은 데이터가 부족해!"
내 위치를 조금 더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선택이 조금 더 가능해질 때가 많아졌다.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 '선택이 영역이 되는 것이냐?'의 문제였다. 이 놀이터엔 미끄럼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놀이기구 타러 가면 된다.
미끄럼틀이 내게 말해준 것은 '내려오려면 올라가야 하고 내려오려면 올라가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건 과정과 결과였다. '어떤 과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를 난 스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일명 '지름길 찾기' 프로그램이 설치된 내비게이션이다. 그런데 세상길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하다. 것도 말도 안 되게 부족한 나의 데이터로는 실행할 수 없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게 하려면?
배우고 익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