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면 된다. 반면 할 수 없는 것들은 지금 당장 할 수 없다. 하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말을 난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 이미 철봉은 세상을 오르는 이 힘이 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내 눈엔 놀이터 자리만 차지하는 걸로 보이는 이 놀이기구는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보였을 거라 짐작한다. 즐기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별로 없는 철봉은 같이 놀자고 하루 종일 소리치지만 듣는 이가 거의 없다.
축구골대가 없는 이 놀이터에 어느 날 우리는 축구공을 차며 들어간다. 철봉은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날 축구골대로 써줘. 같이 놀자.'라며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축구 골대로 쓰기에 너무나도 안성맞춤이라 우린 그 손을 잡는다. 축구경기가 시작된다. 상대편이 툭 찬 공이 우리 편 철봉골대로 데구루루 굴러간다. 난 실점을 막으러 뛰어간다. '꽝' 큰 굉음 뒤 이어지는 '둥~~~' 진동음이 울려 퍼진다. 음악시간도 아닌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곡을 하게 된다. 축구공만 보고 뛰다가 이마를 부딪히고 쓰러진 것이다. 그 순간에도 두 다리는 이미 골인된 공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린 듯 앞으로 달린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감긴 두 눈은 낮에도 머리 위에 별이 떠있다는 진실을 보게 되고 달리던 두 다리는 초등학생인 나에게 관성의 법칙을 선행학습시킨다. 집착이 때론 헛되다는 교훈을 이때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팠던 기억이 난다.
이마의 혹은 철봉선을 못 넘는다는 한계의 표식 같다. 축구는 끝이 났고 우린 집으로 돌아간다. 철봉은 친구를 기다리는지 어제처럼 오늘도 그 자리에 서있는다. 난 도무지 축구할 때 말고는 이 놀이기구의 재미를 모르겠다. 기껏해야 낮은 철봉에 폴짝 뛰어 배를 접점으로 폴더놀이를 하거나 오래 매달리기정도인데 아무런 흥도 나질 않는다. 여전히 재미가 없다.
어느 날 철봉이 그토록 기다리던 친구가 나타났다. 나는 시선을 그곳에 집중한다. 그는 온전히 팔힘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나는 '와! 와!'라는 감탄사만 내뱉으며 지켜본다. 신기하다. 나도 그전에 철봉을 몇 번 잡고 시도는 해보았다. 그러나 턱걸이 한 번을 못하는 나는 그의 모습을 부러워할 법도 한데 애써 안 그러려고 한다. '나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조차 안 들도록 나 자신을 기가 막히게 속여왔는지 모른다. '난 철봉이 재미없어. 저런 걸 뭐 하려 해. 난 안 하기로 선택할래.' 이 합리화는 자신에게만 통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놀이기구라는 사실은 이마의 혹으로 여실히 드러난다. "너 그 혹 뭐야? 다쳤어?"란 질문에 '이거 철봉 하다 다쳤어.'라 말할 수가 없다. 철봉은 이마에 혹이 나기 힘든 놀이기구다. 철봉 앞에서 속일 수 있는 건 나 자신 말고 없는 듯하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근력이 있어야 한다. 근력은 거짓말이 잘 통하지 않는 능력이다. 하면 늘고 안 하면 안는다. 난 안 했다. 그래서 중력을 이겨내기에 내 근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마치 철봉높이는 내 능력의 한계선인 듯하다. 높은 철봉은 올라가고 싶어도 못 올라간다. 난 근력을 늘릴 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철봉을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철봉선이 낮아져야 했다. 철봉이 날 맞춰줘야 가능했다. 세상이 날 맞춰줘야 가능하다. 내가 가는 놀이터에 버젓이 존재하지만 난 즐길 수가 없다. 해보고 재미없어 안 하는 선택이 아니다. 해보고 관심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난 관심 있지만 포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놀이터의 놀이기구 하나는 낮에 별을 보기 위한 축구골대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철봉 턱걸이 한 번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러나 근력 키우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된다. 왜? 지금 하고 있으니까. 근육만큼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서 턱걸이를 처음 한 날 드디어 철봉은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가 된다. 포기한다면 철봉은 그저 축구골대일 뿐이다. 축구골대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많다. 그건 내가 지정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 어려운 철봉은 마치 세상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론 내가 원하면서 안 하기로 선택했다고 자신을 속였다. 더 나아가 관심조차 없는 척했다. 실상 난 하길 원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잡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못할까 봐 두려워서. 귀찮아서. 그런 내 마음이 들키기 싫어서. 자존심 상해서. 이마에 난 혹 같은 이런 숱한 감정들이 습관이 되어 자기 합리화만 늘어갔었다. 그러다 포기했다.
잘살고 싶다. 부자 되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이 높은 세상이란 철봉을 어떻게 오를까? 맘속에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상황도 오고, 잘하고 있는 건가 의문점이 드는 상황도 오고, 나도 모르는 사이 손을 놔버리는 상황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리고 자신감은 떨어지고 난 안되는가 보다고 낙담한다. 그래도 다시 노력해 본다. 그러다가 '이젠 알았다. 이거였어.' 하면서 기분 좋다가 다시 안 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도 계속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이 과정들이 습관이 되어 세상에 오르는 힘은 늘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른다.
이마의 혹이 준 교훈
1. 관성의 법칙 - 달리는 두 다리
포기하지 않으려 할수록 포기 안 하려 한다. 하려 할수록 하려 한다. 습관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2. 진실 - 낮에 뜬 별
진실은 내가 못 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집착은 때론 내 시야를 좁게 한다.
3. 자기 합리화 - 이마의 혹
자기 합리화는 진실 앞에 무용지물이다. 솔직한 것만큼 논리적인 것은 없다. 논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일단 솔직하자.
난 나만의 이런 결론의 형태를 기억 속에 저장하려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내가 포기 안 하고 계속 성장해 나감에 있어서 나를 바꿔야 하는 시점이 분명히 온다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누군지에 대한 형태가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바꾼다는 건 그전 형태가 보여야 가능하니까. 그것을 인정이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의 난 내일의 나보다 어리석을 수 있다.
내가 그토록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을 때 간절히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낮에도 별은 떠있다. 그렇듯 이 질문의 답은 내가 가는 미래의 진실로 떠있을 것이다. 난 이 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원하는 것을 위해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