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너무 빠르게 가고 있다. 그 시간 더미들 속에는 기록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탄피처럼 묻혀있다. 빛과 열을 내며 무언가를 해칠만한 충격까지 만들어 냈던 것들이지만 지금은 그저 껍데기만 차게 남았을 뿐이다.
그것들을 일일이 주워서 모아 담고 싶은 의욕은 지금의 내게는 일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의 이야기만 해보자.
오늘은 도서관 일을 하고, 전자책을 읽고,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지금은 일기를 쓰고 있고. 도서관에서 이번 주에 배정받은 서가는 문학(800) 서가이다. 청구기호에 맞게 정배열이 되어있는지 확인을 하다가 같은 번호 대인데도 다른 단에 나뉘어서 꽂혀 있는 것이 많아서 조금씩 수정을 했다. 문학류는 도서관 이용객들이 가장 많이 찾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더 신경 쓰게 되는 것 같았다.
'도서배가 및 서가정리' 업무가 끝나고 근로장학생 책상에 앉아『인형의 집』전자책을 읽었다.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도 과제하려고 빌려간 것인지 대출가능한 종이책이 없었다. 과제는『인형의 집』을 읽고, 노라와 토르발의 4막을 상상해 보라는 과제였다. 토르발은 죽여버렸고 노라도 팔푼이로 만들어버렸다. 생성형 AI인 Claude에게 "작품이 가진 여성 해방적, 계몽적 메시지를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지당하신 피드백을 받았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제출해 버렸다.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평가받는 작품을 가부장적 관점으로 해석한 것 같아 온 세상에 미안했지만 과제를 두 번하긴 힘들었던 것 같다.
며칠 전 친구의 알선으로 새로운 단톡방에 들어가게 됐다. 고립은둔청년들의 일상회복을 위한 자조성격의 단톡방이었다. 기존에 교류하던 청년들과의 단톡방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느낌을 받고 있다. 좋은 부분도 있고 좋지 않은 부분도 있다.
좋은 부분은 삶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굉장히 열성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좋지 않은 부분은 타인의 상황이나 고통을 평가, 판단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은 부분이었다.
단톡방에 입장한 후 자기소개를 했을 때 나에 대한 평가 멘트를 하신 분이 있었다. 직접 두 번 뵀던 분이었다. "솔직히 고립은둔청년 느낌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붙어있는 비언어적 표현을 묘사한 . 이나 ; 에서 나는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 본인 의도는 무해했더라도 말이다.
나는 자신이 타인을 평가/판단하는 버릇이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역으로 그걸 당했을 때 거부감을 많이 느끼는, 그런 굉장히 알만하고 전형적인 부류의 사람이다. 그래서 지원사업에 처음 참여했던 작년부터 지금까지 저런 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늘 거북했었다. 그런데 요즘 인내심에 한계가 와서 그런지 유독 저 때 더 안 좋게 받아들였다.
"방에만 10년 있었습니다. 자격 충분하죠?" 하고 예열 없이 즉답했다. 당신 나보다 오래 썩었어? 아니잖아. 하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무례하고 까칠하게 굴 수 있는 건 당신들만이 아니야. 되도록이면 지구상의 갈등의 총량은 늘리지 않고 행복의 총량을 늘리고 싶었기 때문에 나도 일일히 걸고 넘어지지 않고 웃어넘기는 거라고.
내 고통이 남들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은 나뿐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봤자 너네는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도 했었고 고립은둔도 끽해야 몇 년 하지도 않았으면서"같은 말을 삼키는 것이다. '내 고통에 비할바는 안 되겠지만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의 고통이 있었겠지.' 같은 뜻의 말은 생각만 하는 것이 어떨까. 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oo님 정도면 괜찮은 삶인데 마음이 문제인 것 같아요."라는 뜻의 말을 위로라고 생각해서 하는 건지 정말 답답하다.
많은 연예인들이 외적으로는 아름다웠고, 재정적으로는 부유했고, 보이는 곳에서는 늘 밝게 웃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돈, 외모, 직업 같은 것들에서의 결핍보다도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건 외로움이 아닐까.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공감받을 수 없고,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뺨은 종로에서 맞고 다녔는데 한강에서 처음 만난 분들에게 괜히 눈을 흘긴 거 같아 죄송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내 마음에 솔직하자면 이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