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지렁이를 한 마리 살렸다. 학교 도서관 옆길로 해서 산책코스를 향해 가는데 아스팔트 위에 아직 촉촉해서 반딱거리는 지렁이가 한마리 가만히 누워 있었던 것이다. 손으로 만질라치면 나도 소스라치듯 몸이 쪼그라들고 지렁이도 마찬가지로 놀라서 온몸을 엄청나게 펄떡거리는 걸 몇 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오늘은 손을 쓰지 않고 나뭇가지로 젓가락질을 해서 흙으로 옮겼다. 효과가 아주 좋았다.
비 온 후에 학교 산책코스를 걷다보면 포장도로 위로 지렁이가 띄엄띄엄 죽어있을 때가 종종 있다. 한 두번 그랬을 때는 그냥 지나치다가 언젠가쯤엔 그게 거슬려서 아직 살아있는 지렁이는 손으로 잡아다 옮겼었다. 그 후에도 한 번씩 눈에 띄면 그렇게 하게 된 것 같다. 바로 옆에 흙이 있는데도 화단과 인도를 구분하는 선을 좀 넘어왔다고 아스팔트 위에서 말라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가혹하다 싶다. 지렁이한테는 그 선이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는 거지만.
여유롭다 보니 지렁이가 어쩌나하고 좀 지켜봤다. 아스팔트 위에서는 미동도 없이 있더니 흙에 던져 놓으니 어디로 미끌거리며 나아갔다. 다시 흙 밖으로 나가면 그건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내 갈 길을 갔다.
도서관을 지나서 학교 본관 뒤로 난 아주 짧은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식식해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받은 스타벅스 기프티콘으로 사 온 부리또와 샌드위치를 화성교 난간에서 아침으로 먹었다. 요즘 비가 좀 와서 그런지 다리 밑으로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 보였다.
식사를 하고 내려와 다시 산책코스를 돌았다. 본관 앞에서 아빠한테 자전거를 배우는 가족을 지나쳐 고양이의 영역인 국제교육원을 지났고 조금 더 산길을 걸어 미대에 도착했다. 날이 굉장히 맑고 햇빛이 밝았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땐 그 밝은 빛이 나를 너무 죄스럽게 만들었는데 이제는 여유롭고 평안하다고 느끼게 해준다는 생각을 했다. 2년하고도 보름 정도 되는 시간이 흘렀고 그 전까지와는 달리 내 인생도 시간과 함께 흐른 것이다. 산책은 더 이상 내 죄를 마주하는 시간이 아니게 되었다.
요즘 주야간 병행 때문에 내가 힘든가 보다. 프로이트 읽기 강의에서 배운 것처럼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미화되지 않은 게 어디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괜찮다고, 재밌다고 말은 하고 다녔지만 이제는 안 꾸게 된 악몽을 요즘 몇 번 꿨다. 아니면 그냥 개꿈을 꾼 타이밍이 착각할만 했을 수도 있는 거지만. 그래도 내가 외면하고 억압한 나에게 "지금 생활이 힘들구나, 지치는구나"하고 인정해줬다.
인정해주는 거랑 별개로 해야되는 건 하던대로 한다. 아주 조금 더 정신없게 움직인 덕에 오른쪽 충치 치료가 며칠 전에 끝났다. 왼쪽 사랑니 발치와 또 그 앞의 치아의 치료만 마치면 미루고 미뤄온 치과 치료가 끝이 난다. 앓던 이를 뽑은 기분이다.
현물치수도면 그리기 복습도 '해야되는데' 생각이 자꾸 들어서 스트레스 받길래 한 번씩 했더니 처음처럼 헷갈리지도 않고 '해야되는데' 스트레스도 없어져서 좋다.
몇달 전 내 오렌지레몬 나무 화분 보고 "비료주지말고 그냥 흙만 좀 더 채우라"는 엄마의 말도 '해야되는데' 목록에 있었는데 그것도 오늘 처리했다. 화분이 잘 자라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읽고 싶은데' 책 목록도 천천히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다.
방으로 돌아와 미뤄둔 소소한 집안일들도 했다.
하고 하다보면, 다니고 다니다보면, 지나고 지나다보면 "된다"는 걸 생각하면서 하고, 다니며 지날 수 있도록 오늘은 맘 편히 잘 쉬고 힘을 충전해야겠다. 선물 받은 쿠키를 햇빛 잘 드는 방에서 커피와 함께 먹으니 이 오후가 가히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