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각할 거리

#책과 영화

by 온호

오늘 천국편을 마지막으로 단테 알레기에리의 코메디아를 다 읽었다. 기록을 보니 8월에 지옥편을 읽고 9월에 연옥 편을 읽었던데 10월은 아마 중간시험 때문에 건너뛴 것 같다.


『신곡』 읽기는 어려웠다. 평범한 학부생 수준의 지식을 가진 독자로서 나는 피렌체의 역사와 관련된 인물들이라든지 신화, 천문학, 철학, 신학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올 때마다 책 맨 뒤의 옮긴이 주로 넘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 때'는 따로 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랬다. 한 곡(canto)이 넘어갈 때마다 핫핑크색 필름 인덱스를 따라 뒤로 넘겨놓지 않으면 불편해서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걸 계속 읽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종종 들었다. 내 수준에 맞지 않아서 읽히지 않는 텍스트였다. 라틴어가 아니라 피렌체 구어로 쓰여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작품을 해석 없이는 한 페이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굳이 읽고 있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내가 속한 문화권에서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훌륭한 작품도 많을 텐데. 도중에 그만 읽을 수 있는 독자의 권리를 생각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리라', '신곡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던 처음의 목적'을 생각하며 끝까지 읽었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우리 인생길의 한가운데에서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나는 어두운 숲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네,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이는 곧은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네.

원어로 된 지옥편의 첫 부분이다. 『신곡』은 서사시인데, 모든 행은 11음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번역본으로 읽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원래의 형식과 구조가 가지는 힘은 애석하게도 전혀 전달될 수 없다는 점도 읽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곡』이라는 제목도 원래의 것이 아니다. 단테는 "Comedia"라고 제목을 붙였고 200년 훨씬 후에 단테 전기 작가인 조반니 보카치오라는 사람이 "Divina Comedia"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일본의 작가 모리 오가이가 번역한 제목이 "신곡"이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다가 내 생각은 종교의 영역으로 뻗쳤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작가라면 긴 세월을 지나면서 후대의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새로운 제목을 붙이고 해석을 내놓는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의미로의 변화, 변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왜인지 그런 현상들을 꽤 싫어한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독자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즉,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며, 최종적인 해석의 권위는 독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주 맞는 말이다. 독자들은 자유롭고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신곡』읽고 이런 감상을 쓰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껏"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성모 마리아의 몽소승천이라든지 천주교 내에서의 마리아의 특별한 위상, 개신교나 불교의 각가지 종파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죄송하게도 이것들은 후대의 작가, 평론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언어"를 가지고 사고 놀이를 벌인 결과라고까지 생각한다. 세상에는 논리로 구분하고 체계를 만들고 그것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소명이고 즐거움인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과 사람이 변하고 논리에 문제가 생겨 패치를 붙인다. 그 위에 또 다음번 패치를 붙이고, 붙이고 거듭하다 보면 원래의 모양은 온데간데 없어지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논리적으로 일관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논리를 발전시켜서 중심을 향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는 건 왜일까.


이런 생각들은 어릴 때 목사의 아들로서 '교회'라는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에서 모두 파생된 생각들인 것 같다. 예수님이 죽으면서 지성소의 휘장이 아래로 찢어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육신이 성전이 되었는데 왜 아직도 사랑과 예수님보다 목사를 섬기는 사람들, 본질이 아니라 만들어진 형식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지에 대한 의문. 답답함도 화도 느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는 생각으로 퉁치고 있다. 어찌 됐건 세상에 진리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진리대로 돌아가고 있을 거기 때문에.


세상은 자유로운 독자들이 자유로운 해석의 권위로 해석한 결과이자 과정이고 그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은 여기서 영화로 넘어갔다.


통제사회 디스토피아에 대한 생각. 정말로 그게 디스토피아인가에 대한 고민. 나는 통제가 없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공동체에 이롭기보다는 개인에게만 이로운, 공동체에는 해로울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믿는다. 우선 나부터가 그렇고 최근 기술교육원에서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고 있다.


그래서 [어벤저스]의 타노스가 핑거스냅으로 공명정대하게 인류 절반을 날리는 것이나 [킹스맨]의 리치몬드 발렌타인이 유심칩으로 사람 머리통을 날리는 이유에 대해 공감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가 힘들지만 나는 그런 빌런들의 논리에도 공감한다. 오히려 어째서 막는 쪽, 자유를 수호하는 쪽만 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지 의아하다.

이런 생각들과 관련해서 영화 [아이,로봇], [아일랜드], [13층], [이퀼리브리엄], [매트릭스], [가타카], [다이버전트], [마이너리티 리포트], [터미네이터], [이디오크러시], [듄] 등이 지금 떠오른다. 생각할 거리가 참 많은 영화들이다. 그리고 나는 주로 이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분류, 통제, 시스템, 형식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바라는 모순이 신기하다. 내가 피해자가 될 때와 수혜자가 될 때의 입장 차이에서 모순이 생기는 것 같다.


오늘의 이야기는 내가 많이 알았으면 감히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무식해서 용감하기 때문에 남길 수 있었던 글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은 내 몸 밖으로 내고 싶은 생각이었다. 순례자의 일주일을 나의 네 달에 걸쳐 따라간 후의 감상이 이렇게 두서없는 글이 된 것은 단테님에게 조금 죄송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