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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xx 하지 않는다.

#둔갑

by 온호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뭘 안 하는지 나는 모른다. 행복한 사람은 뭘 안 할까 궁금해하며 기웃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것만 안다. 도서관에서 책장 정리를 하다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는 소설 제목을 보고 했던 생각이다. 한여름 줄지어서 등목을 하는 남자들마냥 한 껏 내민 책등에 새겨진 제목을 보고 '걔네도 시계는 볼 걸?'하고 생각한 후에 '그럼 걔네는 뭘 안 할까'하고 혼자 문제를 만들어 봤었다. 정답 맞히기를 해보자면 행복한 사람은 걱정, 비교, 집착, 남 탓 등등을 안 하지 않을까. 아, 행복한 사람은 지랄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났다.


겨울

겨울이 되면 왼쪽 젖꼭지가 아프다. 바로 지랄을 해버린 것 같지만 난 행복하다. 겨울이 되면 왼쪽 젖꼭지가 아프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하다 왼쪽 젖꼭지가 살짝 따끔거리다 마는 것을 느꼈다. 겨울이 오고 있나 보다. 이 겨울 감지기는 몇 년 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작동하고 있다. 오른쪽은 안 그러고 왼쪽만 그러는데 오른쪽이 무슨 덕을 짓는 동안 왼쪽은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 건 아닐 거다. 네 잘못이 아니야 좌유두야.


둔갑

브라우니가 레몬쿠키로 바뀌었다. 점심을 먹고 다음 강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한적한 빈 강의실 안에서 휴식을 즐기다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자리를 맡기 위해 가방을 책상 위에 놓고 가방 겉주머니에서 브라우니를 꺼내 패딩 주머니로 넣었다. 물론 나는 눈으로 보지 않고 가방에 손만 넣어 뒤적거려서 손에 걸리는 비닐포장된 브라우니를 움켜 잡아 보지 않고 옷 주머니에 그대로 넣었다. 그리고 휴게강의실로 이동해 패딩 주머니에 왼손을 넣고 브라우니를 움켜 잡아 꺼내 비닐을 뜯으려고 보니 내 손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브라우니가 아니라 레몬쿠키가 들려 있었다. 내가 쳐다 본 순간 브라우니 레몬쿠키로 변한 것인지, 처음부터 브라우니는 없었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난 정말 엄청나게 놀랐다. 난 언캐니를 느꼈다.

에타에서 본 [고전 읽기-프로이트] 강의 평가에 학생들이 언캐니, 언캐니 하며 남발하고 놀고 있던 이유도 이제 알았다.


아침

요즘 아침에는 일어나서 스트레칭, 플랭크, 팔 굽혀 펴기 40개만 하고 있다. 그마저도 안 하는 날도 있다. 잠을 안 깨고 7시 직전까지 자게 되면서 이렇게 되었다. 새삼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팔 굽혀 펴기 200개랑 스쿼트 160개를 하거나 대충 하고 싶은 날은 160개 120개만 하고 가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대단하다. 그때의 나는 '어차피 깨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6시 30분부터 7시까지가 맨몸운동 시간이던 생활도 언제 훌쩍 지나갔는지.


손님

어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다. 이번 주 월요일 화요일은 건축목공 모의시험을 1조가 보기로 했는데 2조 인 내가 갑자기 테스트를 치르게 된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다음 주 월요일 화요일에 모의시험을 보는 것이어서 이번 주는 개인 연습을 하거나 1조 시험 진행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시뮬레이션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근데 요즘 쭉 별 일 없이 지내서 그런 것인지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시험 들어가세요" 말이 이상하게 반갑게 들렸다. "제가 1조였나요?"라고 하면서 동시에 속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상하라', '오! 예상치 못한 일 발생~헤헤' 이런 목소리가 났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손님이 반가웠던 것 같다. 이 손님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사실 언제든 올 수 있는 손님인데.

따릉이 레버를 안 내리고 온 바람에 시험 설명을 듣다 말고 대여소까지 왕복 달리기를 해야 했던 것도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괜찮았다. 시험은 두 달이 조금 넘는 동안 배우고 연습한 것을 테스트해보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던 탓인지 두 시간 반이 지난 줄도 모른 채 갑작스레 끝났다. 깜짝 놀라면서도 내가 얼마나 몰입했던 것인지 알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 즐거운 마음이 청소를 하는 동안까지도 여운으로 남아 좋았다.


둔갑 2

오늘 아침 9시, [고전 읽기-삼국유사] 출석을 부르는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명 한 바퀴를 다 돈 후 늘 그렇듯 교수님은 대답이 없었던 이름들만 다시 한번 불러 확인했다. 그리고 내 이름도 다시 한번 불렸다. 나는 약간 놀랐지만 늦지 않은 타이밍에 다시 한번 대답했다. 요즘 대학생이 아닌 나는 요즘 대학생 답지 않게 아주 호방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기 때문에 교수님이 못 들었을 리는 없어서, 나는 교수님의 다음 말이 있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상당히 의아한 상태로 있었다.

교수님은 이름 몇을 더 부르시고는 "이 다섯 명은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했다. 과제 제출 기간이 지나고 처음 돌아오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 과제가 AI사용 혹은 내용 부실로 0점 처리를 당하게 됐다는 말을 듣게 됐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수업시간 내내 1시간 동안 불편했다. 변명도 준비했다가, 내 과제 내용을 다시 읽어봤다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당당하자 생각했다가 하면서 수업에는 하나도 집중할 수 없었다. '역시 AI가 짜준 구조는 너무 완벽했나 보다, 좀 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주제를 찾고 조사를 할 걸, 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순간에 전력으로 몰입할 걸' 같은 후회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앞자리에서 강의 시간 내내 SNS를 하거나 복사 붙여넣기로 과제를 하던 학생들이 낸 과제는 무사히 통과됐다는 점에 짜증을 느꼈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부조리 앞에 무기력을 느끼기도 했다.

교수님은 강의 시간을 15분이나 남기고 일찍 강의를 마치셨다.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아 보여 겁이 났다. 그리고 다섯 명을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주섬주섬 가방을 싸면서 학생들이 조금 나가길 기다렸지만 소용없었고, 과제를 0점 처리당할지 새로 한다고 할지 마지막 고민을 마친 채 앞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교수님 옆에 도착한 나는 죄인 표정을 짓지 않고 최대한 덤덤하게 있으려고 애쓰면서 나머지 넷을 기다렸다. 출석부 위 여백에는 이름 다섯 개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섯이 다 모이고 교수님이 입을 떼려고 하기 직전에 나는 퍼뜩 얼마 전 교수님이 몇 명에게는 발표를 시킨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게 혹시 발표할 사람들을 부른 거일 수는 없을까? 그럼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내 궁금증은 곧바로 해결이 됐다. 교수님은 발표를 좀 할 수 있겠냐고 하시면서 다섯을 셋과 둘로 나눠 일정을 조율했다. 내 마음은 편한 정도를 넘어서 헤실헤실 웃음이 나오려고 할 정도였다. 너무 안도가 되면서 기분이 좋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무 대가 없는 발표를 하는 것과 PPT를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후회와 양심의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발표에 대한 가능성을 한 시간 동안이나 떠올리지 못해 고통받아야 했는지에 대한 원망도 사소한 문제였다.

강의실을 나와서 전공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는 길에 발표를 어떻게 구성할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다. "긍정적인 기분은 창의성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교과서 속 문장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의 기쁨도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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