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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09.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잘하고 있는' 나의 일상들

나의 탁상 달력에 동그라미 그려진 날들


2월 28일 O 수요일 둘째 누나 통역 (할 동안 애기 좀 봐주기)

2월 29일 O 남산. 남산도서관. 은행 업무 (청년들과 남산 모임)


3월 4일 O 동사무소 (작년부터 셋째 누나가 알아보라던 차상위 해당되는지나 주거, 생계 급여 관련 상담받아보기.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서 안 하다가 드디어)

         학자금 대출 중도 상환 (일을 하니까 너무 갚을만한데 처음 갚았다. 일한 거 조금씩 넣으면 될 듯)

3월 5일 O 보드 동아리 가입 신청 및 회비 입금 (14년도 땐 가입했다가 아서 그만뒀웠지. 애들이 너무 잘 살아서)

          <불교와 정신분석학> 강의 관련 템플스테이 신청 및 입금.(템플스테이가 있었어? 넌 진짜 강의계획서 좀 보고 수강 신청 해야 되겠다. 강좌명만 보고 고르지 말고 좀. 근데 오히려 좋긴 하다.)


3월 7일 중랑천 (중랑천 가까운 청년들이 모여봤다)

3월 8일 클라이밍 찍먹. 서울시 산악문화 체험센터




서른넷에, 3학년 1학기 시작한 시점에 취업 준비는 안 하고 놀기만 하고 한량짓하고 다니면서 뭘 '잘하고 있는 나의 일상'이냐고 할 수 있겠다.


안 죽고 그냥 인간 세상 속에 발 붙이고 '하루'를 살고 있으니까 잘하는 거다. 너무 소박해져 버린 나의 꿈.

< 살기 >


살기, 살아보기, 살아내기. 생로병사, 희로애락 뭐가 됐든 그냥 살기. 사람들 만나서 웃고, 밥 먹고, 때론 마시고 그리고 사랑하고 헤어지기.


매년 100억 규모의 자선사업을 할 수 있는 사업가, 경영자가 되겠다던 비전을 품었던 중3짜리 남학생에겐 미안하게 됐다. "미안."




내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15년 전 고3 국어 시간에 했던 논술 수업이 있다. 성공한 사업가 아저씨와 해변에서 신선놀음하는 어부 아저씨 대화 이야기였는데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비판적 수용을 해보라는 주제였다. 지금도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 것 같다.


성공한 사업가: 어획활동을 좀 더 열심히 해서 큰 배를 사고 사업을 확장하고 멋지게 해변에서 쉬는 게 좋지 않냐

어부: 내가 지금 그러고 있지 않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왜 평생 이 수업을 못 잊냐면 너무 둘 다 맞는 말 같아서 아무리 고민해도 골라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태일까 만족일까. 열정일까 욕심일까. 아니면 이것들은 반으로 나누면 안 되는 것들일까? 중용을 찾아야 한다?


그래도 내 맘 같아선 한계효용체감으로 더 이상 만족감과 행복감이 늘지 않는 지점까지는 열심히 성공하고 벌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정말 오늘 만족하는 연습을 내일로 미루면 어떤 날에도 연습부족으로 행복이 어설플까?


아빠는 명백하게 어부아저씨 타입이지. 나도 아빠 닮았나? 대책 없다 정말. 그래도 일단 행복하게 살자. 네가 행복하면 됐다 나야.


그래도 8년 만에 돌아온 학교에서 지난 학기 평점 4.0을 받았다는 불변의 팩트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 사실이 나를 조금 안심시켜 준다. 학업(해야 할 일)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남산 갔을 때, 남산도서관에서 일요일마다 영화를 틀어준다는 걸 알게 돼서 당분간 일 없으면 신세 좀 져볼까 한다.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도 되어보자. 지난주엔 도서관에서 보여준 <빨간 머리 앤>을 보다 그만 울어버렸다. 앤도 울고 마릴라 아줌마도 울고 영화를 보던 아저씨들, 할아버지들까지도 훌쩍훌쩍해버리니 참을 수가 있나. 점심 먹으러 갔던 구내식당은 놀면 뭐 하니 '쓰저씨'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이 미어터져서 제육 메뉴를 30분 넘게 기다려서 먹었다. 고역이었다.


동사무소는 직원분이 굉장히 친절하셨다. 내가 가진 두려움(전산 작업, 서류 작업, 금융과 관련된 것들) 집합체라서 피하다가 이것도 이제야 조금 마주 보는 것 같다. 투자론, 금융자산론, 보험학원론 너네도 딱 대.


템플스테이는 망경산사로 예약을 했다. 망경산사 포함, 월정사와 조계사가 교수님과 연계가 된 사찰이라 할인이 된다. 덕분에 템플스테이도 해보고 여행도 가게 되었다. 처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재밌어 미치겠다. 세상을 한 번 재밌게 느껴보고 싶다고 10년 정도 세상을 등졌다가 개벽한 세상으로 다시 튀어나올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그렇게 됐다.


중랑천은 너무 좋았다. 뭔가 사람들 분위기도 더 편안했다. 한 두번 더 봤다고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완된 모습이 나오는 것 같다. 나는 학교 끝나고 바로 뛰어갔는데도 약속 시간에 못 맞춰서 속상했는지 환승역에서 자잘한 실수를 연발했다. 근데도 그냥 사람들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냇가에서 컵라면 먹고 과자 먹고 소주 조금 하는데 아주 낭만 차올랐다. 산책도 하고 안경도 잃어버렸다 찾고 생동감도 넘쳤다.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자 일정인 클라이밍. 서울시 은둔고립청년 지원사업을 신청하면서 알게 된 청년 몽땅 정보통 사이트를 조금씩 활용해 보려고 최근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가 발견한 '운동찍먹-클라이밍'에 신청을 했다. 12년 동안 국가대표 감독인지 코치셨다고 한 강사님께 첫 수업을 사사받았다. 생각보다 너무 고차원적인 스포츠여서 놀라웠다. 딱 보면 어떤 스타일의 등반을 좋아하는지는 물론이고 자존감 같은 심리적 상태까지도 알 수 있다고? 대단하다.


공간지각이라든지 이미지화 능력이 중요하다는데 둘 다 나의 최대 약점인 능력치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앞팔은 고무장갑에 바람 불어넣은 것 마냥 빵빵한 느낌이 났다. 팔이 터지진 않겠지 그래도.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거는 다 해버렸지만(팔 접지 않기, 발바닥으로 밟지 않기) 재밌기는 엄청 재밌었다. 길 찾는 재미와 길에 대한 승부욕이 자꾸 생기는 것이 재밌었다.     


오늘도 실컷 놀아재꼈다. 가족 단톡방에 산악문화체험센터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더니 여동생이 오빠의 웃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단다.


뭐 그럼 됐다고 치고 양심없이 잘 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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