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뇽이 Apr 13.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51

일주일치 에피소드 종합

 월요일: 가창실기 수업에서 내 개인발표 차례가 있는 날이었다. 방에서 연습할 환경이 되지 않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연습해서 <빨래> 수록곡인 홍광호의 <참 예뻐요>를 불렀다. '악보대로'가 원칙이라 악보 읽어주는 앱도 깔고 박자를 연습했는데 실제로 노래 부를 때는 피아노 반주가 아니라 유튜브 MR로 부르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다. 발표 전에 긴장이 되는 걸 나름대로 조절하고 처음엔 그냥 불렀는데 부르다 보니 손에 쥐가 날 정도로 떨렸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큰 소리로 노래 불러본 적이 없는 걸 극복하려고 용기 내서 신청한 수업인데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청년들이랑 처음 노래방 갔을 때도 발발 떨었었지. 


가창실기 수업이 끝나자마자 안산 자락길로 벚꽃 놀이 모임을 위해 출발했다. 슬슬 벚꽃 시즌이 끝날 것 같은데 동아리 단톡에 얘기가 안 올라와서 먼저 말을 꺼냈다가 어찌어찌 바로 다음 날로 정해졌다. 그 바람에 멤버 한 분에게 일정 전달을 당일에 하게 됐다. 연락책이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연락을 안 하셨을지도 몰랐다. 당사자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줬을까 봐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상황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내가 좀 더 신경 쓰는 게 맞겠다 생각했다.  

아쉬움이 있으면 또 좋은 일도 있는 것인지, 당일에 모임에 새롭게 오신 청년 분도 계셨다. 믿음직스러운 분이라 가끔 카톡 친구 목록을 보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일로 나도 선뜻 먼저 이야기 꺼내는 게 힘들어져서 생각만 했다. 근데 어떻게 모임 몇 시간 전에 연락이 와서 이번에 참석해도 되겠냐고 하시길래 4시까지 안산으로 오시면 된다고 했다. 사진도 이 분이 찍어주셨다. 한사코 거절하지 않는 한 소중한 순간을 남기셨으면 하는 바람에 두 번 정도는 권해서 먼저 사진을 예쁘게 찍어드리고 내 것도 부탁했다. 


지금 당장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아니면 사진 자체를 찍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이 들더라도, 찍기 귀찮더라도, 10년, 20년이 지나 다시 보게 될 순간에 그 사진 속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름다울 것이다. 


오후에 안산에 올라갔을 때는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다. 꽃동산이었다. 막 벚꽃보라가 휘날리고 각종 튤립이며 히아신스들이 심겨 있었다. 내년에도 사람들이랑 같이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요일: 돈 관련된 일들을 좀 하고 기숙사 방에서 zoom으로 비대면 수업을 들었다. 이번 주는 비대면 강의랑 동영상 강의로 대부분 수업이 진행돼서 편하긴 했다. 보드 동아리에서 보드 공구를 하길래 비싼 건지 싼 건지 기준을 모르겠어서 미루다가 주문했다. 결론적으로 싸게 사는 게 맞다고 밝혀졌다.


 수요일: 토요일에 공부하기가 싫어서 사전투표할 겸 외출을 했었는데 그래서 선거 당일에는 투표를 안 하고 공부를 했다. 당겨 썼다. 레몬 나무 옮길 화분도 샀다.

레몬 화분에서 발견. 넌 어쩌다가..


 목요일: 오전 공강에 유치원 출근하고 밥 먹고 비대면 강의 듣고 다시 유치원 출근을 했다. 퇴근 시간 한 5분 전쯤에 원장실에 가서 도와주실 수 있냐고 인터뷰 요청을 드렸다. 원장님이 저번에도 도와줄 거 있으면 들어는 줄 수 있으니까 편하게 오라고 하셨었는데 덕분에 마침 진로 체험과 관련된 글쓰기 과제가 있어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원장님의 그동안의 길도 듣게 되었고, 원장님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상황에도 도움이 많이 됐다. 


그리고 내가 유치원에서 본 선생님들이 겪는 부조리는 착각이 아니었다. 부모 교육의 절실함을 느꼈다. 난 항상 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양육 환경에 적응하고 학습하며 생존하는 과정에서 성격이나 행동을 형성해 나갔을 뿐이다. 단체 생활에 방해가 되는 애들도 그런 특질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좋은 점도 많다. 말을 더럽게 안 들어도 레고를 기가 막히게 조립한다거나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게임을 잘한다거나 똑똑하다거나 해서 깜짝 놀라게 하는 애들도 많았다. 안 좋은 환경에서 학습된 행동들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적어도 아이에게는 어른에게서 보다는 좋은 심성을 발견하기가 쉽다. 


그리고 사실 단체 생활이 아니면 그런 성격도 문제 될 일이 없다. 시스템에 끼워 맞춰야 되니까 찌그러지는 아이들이나 밀어 넣는 선생님들이나 힘든 것 같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사회-양육자-교육기관 사이의 구조적인 문제도 많이 좋아졌으면 한다. 하여간 어른이 문제다.


 원장님 이야기를 대략 50분 정도 들었더니 내가 인터뷰를 받기로 한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식목일쯤에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산업디자인과 학생들이 내 브런치를 보고 메일을 보내왔었는데 같은 3학년이고 나도 과제로 인터뷰를 해야 했다 보니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빠르게 수락하는 답장을 보냈다. 우리 모두 일이 스무스하게 진행되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얼마나 좋아요? 


 "청장년층 은둔형 외톨이의 단계적 사회 적응을 돕는 모바일 앱 서비스를 기획 중에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의 은둔 탈피 시도 실패가 재은둔과 은둔 장기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서비스를 고안 중입니다. 문헌 조사만으로는 은둔형 외톨이를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히키코모리 관련 글을 꾸준히 브런치에 게시 중이신 디뇽이 님께 인터뷰를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취지도 얼마나 좋은가. 접근해 오는 방식에서도, 인터뷰 당일에 느낀 이 분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도 관련된 공부를 하셨다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학교 호관대 옆 이디야에서 만났다. 총 세 분이 오셨고 사실 비대면으로 해도 상관없었는데 시험 기간이니 이런 식으로 명분을 만들어서.. 매일 산책하는 길 바로 옆인데 이디야를 갈 일이 없다 보니 이번 계기로 처음 가본 것도 좋았다. 녹음이나 촬영분이 수업시간에 쓰인다고 알려주셨고 동의했다. 나도 찍어야지 하고 찍은 사진이다. 


준비하신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면서 나한테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터널 속 10년과 그 이후의 8개월 정도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 


그리고 음료를 하나 사주신다길래 민트초코를 골랐다. 저번에 컴포즈커피인가에서 처음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좋았어서 다른 커피점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나는 민초파라고 할 정도로 요란스럽진 않지만 사실 민트초코에 반감도 없다. 어릴 때 부모님이 선물 받던 초콜릿에 럼이 들어간 거라든지 민트가 들어간 거라든지 먹어보면서 그냥 맛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영향이 있는 것 같다. 또 이사하기 전 예전 집 교회 마당에 화단에 박하가 있었어서 그런가. 14년 전 배라에서 '치약맛'이라며 민트초콜릿아이스크림을 소개하고 같이 나눠먹었던 친구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일 수도. 


 어제는 수업 듣고 일하고 퇴근하고 학교 앞 타이 음식점에서 똠양꿍을 먹어봤다. 소비 합리화기도 하지만 10살 조카보다 먹어본 음식이 적은 건 그래도 스읍, 쫌. 무의식에서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의식에서는 이유를 댈 뿐이라고 하니까 흠칫스럽지만 아잇 뭐 좀 해보자. 이럴 시기도 있는 거지.


 토요일 오늘.


기숙사 헬스장은 6시부터 문을 여는데 잠이 이때 깨기도 하고 최대한 조용하게 맘대로 이용하기 위해서 시간을 맞춰 간다. 그리고 나와서 캠퍼스 산책을 한다. 벚꽃이 지고 새로운 꽃들이 많이 피었다. 벚꽃은 색깔이 티미해서 저런 알록달록한 꽃들이 더 예쁘게 보인다. 어느새 나무들도 푸르러지고 있다. 청소하시는 분들이 송풍기로 치워버리기 전에 벚꽃 잎이 깔린 꽃길도 걸어보고.


그리고 요즘 찍었던 사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벚꽃 시즌에 아침에 학식을 먹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에서 바닥을 보다가 찍게 됐다. 미술관에서 봤던 선으로만 이루어진 작품들이랑 저게 뭐가 그렇게 크게 다른지 모르겠다. 인도와 아스팔트에 돌색으로 한 줄, 연분홍색으로 한 줄, 노란색으로 한 줄. 국기 같기도 하고 무지개떡 같기도 하고 미술 같기도 하다.  


가끔 얘기하게 되는 대학생들 상대로 "학교 안에 이렇게 예쁜 것들이 많은데 이런 걸 누려보라."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는 순간을 막지 못하면 나는 걔네가 체감할 수 없는 가치를 설파하는 꼰대가 아마 되겠지..? 

안타까운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5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