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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y 09. 2024

히키코모리 탈출은 쉽지 않다.

어 나 좀 힘든데? 쉽지 않네. 힘들다, 그래. (57)

5월 7일 화요일


동생이 화요일이 건강 검진날이라고, 병원이 학교랑 가깝다고, 시간 되면 점심 같이 먹을 수 있냐고 물어봐서 그러자고 했다. 화요일은 마침 점심시간에 딱 1시간 정도가 비는 날이다.  

9시부터 12시까지유치원 근로를 했다. 이 날은 어쩌다 11시 50분 부터12시까지 타임어택으로 교실 청소를 해야해서 땀이 좀 났는데 그 상태로 나오자마자 그네에 동생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좀 움찔했다.

그리고 같이 매일 아침 먹으러 가는 학생 식당 건물로 들어갔다. 동생은 연신 애들이 왜 이렇게 어리냐며 격세지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너한테도 그렇게 보이는데 나는 어땠겠냐고 힘들었던 티를 내니 순순히 격려 멘트들을 내어줬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밥도 배부르게 먹었다.


본가갔을 때 동생이랑 소소하게 한사바리 한 거 가지고 썼던 배설글이 생각난다.

동생도 집에 가는 길에 후회했을 거라는 걸 말 안해도 안다. 화요일에 같이 밥 먹자고 하는 게 그거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찌질하긴 지만 그렇게 배설글을 썼어서 그런지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도 다시 볼 때는 좋기만 했다.


9개월 가까이 학교에서 밥 먹으러 다니면서 보기만 했던 식당 입구 카페가 있다. 동생이 온 김에 거기에 갔다. 이 날 아침을 먹고 나오면서 거기서 쿠키를 사갈까 하다가 참았었는데 참길 잘했다. 처음 먹어보는 게 혼자일 때인 거보다는 누구랑 같이 있을 때 처음 먹어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커피를 다 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수업들으러도 가야해서 짧은 시간을 뒤로 하고 일어났다. 동생이 나 먹으라고 쿠키를 한 봉지 넣어줬다. 내가 고른 쿠키보다 동생이 나 먹으라고 골라준 쿠키가 더 맛있었다. 그리고 이 때 왠지 포켓몬 게임이 떠올랐다. 몬스터볼을 던지기 이전 턴에 알맞은 먹이를 주면 포켓몬 포획확률이 상승하는데, 내 경우엔 쿠키를 앞에 던져주면 포획확률이 상승하겠다 뭐 그런.


 "엄마 아들 꿋꿋하게 학교생활 잘하고 있네요."

동생과 같이 찍은 셀카와, 인사하고 뒤돌아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내 뒷모습 사진과 함께 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근데 실은 내가 요즘 좀 지쳤고, 긍정적인 생각도 많이 못하고 있고, 그래서 좀 쉬고 있는 상태라서 마음 한 구석에서 떳떳치 못했다. 요즘 히키코모리 때 같은 생활을 좀 하고 있다. 내려간 상태인가 보다. 선생님이 내려갈 때는 다시 올라가면 된다고 하셨었지. 올라가있으면 다시 또 내려갈 거고. 8개월 정도 만에 내려오는 곡선을 그렸네 나.

      

5월 8일 수요일 어버이날

운동을 하고 산책하고, 밥을 먹으러 가는 모닝 루틴 그대로 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외로웠다.

요일은 강의가 모두 동영상 강의로 대체된 날이었고, 한 과목은 미리 들어놓아서 학업과 근로 이외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2024년 서울시 고립은둔청년선정 면담도 수요일로 예약을 해놨다.


아침에 주민센터를 가서 복지 관련 볼 일도 봤다. 그리고나서 11시에 예정된 면담을 위해 생명의전화 복지관으로 향했다.

주민센터 앞 화단에 있는 마가렛(검색 결과)

(작년 가을에 구절초를 보면서 얘가 데이지인가 하고 알아봤었다. 데이지는 봄에 피고 구절초는 가을에 핀다고? 데이지는 꽃잎이 더 둥글다고? 하면서 공부했었는데 화단에 있던 이 녀석은 개화시기로는 데이지일 것 같은데 뭔가 꽃잎이 그렇게 둥근 것 같지 않았다. 검색해보니 마가렛이라고. 국화과 어쩌고 데이지의 종류 어쩌고 하는데 어줍잖게 알 거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 데이지 종류가 참 많네)


1층에서 어버이날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청년공간 방으로 입실.

작년 9월 쯤에는 옆 방에서 면담을 하면서 구원을 얻었었는데 그 때와 여러가지 많이 변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상담사분께 "도착했습니다!" 하고 카톡을 보냈다.

면담을 하면서 현재 내 상황이 학교도 다니고, 알바도 하기 때문에 고립상태가 아닌데 신청한 이유같은 것을 물어보셨다.

이런저런 대답을 했는데 상담사분이 한 마디로 요약을 해주셨다.


"적을 두고 싶으신 거네요."

'아하'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나보다. 적을 두고 싶은 거였구나 맞아 그랬지. 그래서 유도관 다닐 때 좋았지.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과 운동을 하면서.


근데 요즘은 외롭다. 학교를 다녀도 외롭고, 유치원을 가도 외롭다. 가족들이랑 있어도 외롭고 청년들이랑 있어도 외롭다.

거짓말을 많이 했다.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브런치에다가도 "괜찮다"고, "좋다"고. 실제로 괜찮아진 것도 맞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10년동안의 내상이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었구나 싶었다.


이건 고칠 수도 없는 거고 고칠 필요도 없는 거겠지. 나는 원래 이렇게 생긴 거니까. 이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할텐데 쉽지 않네. 쉽지 않다.


작년에 활동할 때 계셨던 쌤은 한 분밖에 남지 않았다. 상담해주신 복지사분께서 한번 인사드리고 가시겠냐고 해서 뵙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눈꼽을 떼면서 나오시는 모습이 벌써 짠했다. 사회복지 쪽이 힘든 거 유명하니까. 내 여동생도 복지쪽이고.


얼굴에 살도 빠지시고 피곤해서 오른쪽 눈에 쌍커풀이 진하게 생긴 쌤이랑 이야길 좀 나눴다. 약간 데면데면한 느낌도 있으면서도 오랜만에 다시 봐서 좋았다. 청년들이 좋은 시간 많이 가질 수 있게 도와주려했던 사람으로서, 도움받았던 사람으로서 각자의 시간들과 마음을 떠올리는 복도엔 따뜻한 기운 았다. 



그리고 복지관나와서 이마트가서 구경하고 오렌지 한 봉지 사고 양말 샀다. 날이 정말 좋아서 안 걷기가 아쉬웠다. 걸어야지.

그리고 학교 근처에 버스타고 돌아와서 늘 간판만 보고 지나쳤던 버거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졸업하기 전에 그래도 근처 식당들 많이 가보고 싶다. 이 동네에서 살았던 흔적이 내 안에 남았으면 좋겠다.

살았는데도 가본 곳도, 먹어본 것도 없었던 지난 인생들이 생각난다. 불안정해서 자꾸 먹는 거로 채우는 거일 수 있다, 참아야한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이 흐름에 타본다. 여지껏 그렇게 살아본 적 없으니까. 돈도 돈이고 밖에 나가는 것도 나가는 거고.


0인 상태로 있지 말자 싶어서 잘 모르는데도 창업 프로그램 교육가서 일단 들어봤다. 대학 안에서 창업지원 관련한 프로그램들을 1시간 정도 소개해주는 날이었다. 쿠키나 축냈지 나한테 도움이 됐나 모르겠다.

창업 관련된 교양 강의가 있다는 걸 알게된 거는 특강 전후로 확실히 달라진 점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사촌동생이랑 저녁을 먹었다. 인스타에 사람들이랑 밥 먹으러 다니는 글을 몇 개 게시했더니 자기랑도 밥 먹자고. 저녁을 초밥먹고 파전집에서 파전이랑 막걸리도 많이 마셨다.

처음에는 만나서 정말정말 뜻 깊은 시간을 가졌는데. 좋은 대화도 많이하고. 뒤로 갈수록 사촌동생이 조금 취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들이 불편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나보더라.

성향 다른 거는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인간 자체가 가지는 고통이나 외로움, 좋은 가치관과 생각은 좋게 다가오면서도, 그 마음들이 표현되는 방식이 나랑 안 맞으니까 부대꼈나보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처신을 잘 못하긴 하는 거 같다. 경험이 없다보니까 어쩔 수 없지. 천천히 배우자.

형 돈 없다고 다 사주는 바람에 잘 얻어먹었다. 지하철 역 가는 길에서 늘 지나치는 초밥집들 볼 때마다 내가 저런데 갈 일도 있을까 싶었는데. 학생들이랑 가기에도 가격이 부담이고 청년들이랑 가기에도 가격이 좀 부담이고. 혼자 가기에는 초밥이 내 우선순위 메뉴는 아니고. 우연히 이런 일이 생기네. 맛은 없었지만. 기름지고 많이 짰다. 다 먹고 나와서 사촌동생이 맛없다고 얘기를 할 때도 머리로는 "아 맞아, 짜더라." 하면서 입으로는 "아이 난, 맛있게 먹었어." 했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맛없는 거여서 다행이었다. 먹으면서 맛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미안했으니까.


사연없는 대문 없다. 정말. 같이 손 잡고 갔으면.


오늘은 마음이 불안해서 글을 썼다.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좀 오랜만이다. 해야될 게 왜 이렇게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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