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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un 01. 2024

공부하다가 쓰는 글

63번째

<불교와 정신분석학> 강의의 PPT를 읽고 있다. 융의 그림자 개념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다가 아빠 생각이 났다.


"에고가 강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됨, 선한 나를 주장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 짙게 도사리고 있으며, 그 강한 에너지가 선한 의지를 관통하여 분출될 때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되기도 함."


목사인 아빠는 그래서 가끔 충동적이었던 걸까?


세탁기에서 뽑은 호스로 엉덩이를 맞을 때는 정말 아팠는데. 매를 맞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배경이 옛날 집인 걸 보면 8살이었거나 그 이전인가 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의) 첫 이사를 했으니. 형이랑 싸웠거나 무슨 나쁜 말을 썼거나 그래서 매 맞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형도 같이 맞는 모습이 보인다.


아빠의 충동적이었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프린트기를 계단에서 집어던져버린 일, 섬망이 온 할머니가 화장실로 가라는 말을 듣지 않고 저항하자 거칠게 끌고 간 일. 할머니가 섬망 상태의 특유의 톤으로 요란스럽게 "아이고고고 내 죽는다~." 했었지. 그리고 그런 일들은 원래 주로 내가 하던 작업을 아빠가 하게 됐을 때 생겼다.  


그래도 아빠는 대극합일을 잘했는지 "사회적 큰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의 가담자가 됨" 같은 일 생기지 않았다.


융의 아버지도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였다고 한다. 필레몬인 융은 교회를 밟고 서있고, 나도 20살이 되자마자 교회를 가지 않기로 선택했다. 융과 닮은 면이 있다며 동질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내 모습.


교회, 종교에 대한 회의와 반감을 가지게 된 사건들


1. 아빠의 모습 -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의 괴리. 오죽하면 8살짜리가 아빠처럼은 산다고 했을까.

2. 목회자 자녀 캠프 - 인도자 청년들이 쉬는 시간에 방에서 자기들끼리만 있을 때 10원짜리 욕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나가다가 열린 문 사이로 보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은혜롭게 기타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던 사람들이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고 당혹스러워하던 청년의 표정이 기억난다. '원래는 저렇다고?'

3. 수련회 -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교회 연합 수련회를 갔다가 엄마 심부름으로 어른들 숙소(목회자 부부)에 물건을 가지러 갔었는데 어떤 다른 교회 전도사님이 너무 고압적으로 나가라며 혼을 냈다. 사정을 이야기했는데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인격적으로 완전히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억울했다. '저런 사람이 전도사?'


지금은 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이해하지만 어릴 때는 뭐든지 길고 크게 느껴지는 법이 아닌가.

위선에 대한 생각을 유독 많이 하면서 살게 된 것도 다 어릴 때의 저런 경험들 때문이다.

그래서 hypocrite 단어를 연두색 커버의 단어장을 외우다가 처음 봤을 당시의 전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위선자. 이 말이 영어에도 있구나.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 너무나 반가웠다. 정말로 까먹고 싶지 않은 단어여서 몇 번을 다시 외웠었다.

 


아빠의 충동적인 모습은 실제로는 그림자 개념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새로 배운 관점으로 내 역사를 다시 보는 재미를 느끼는 과정이다. 슬라이드의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되기도 함" 옆에다가 괄호를 치고 아빠의 프린트기?라고 적으면서 콧숨으로 웃는 나. 너무나 미웠던 아빠의 흉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은 추억이 됐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내가 우리 아버지를 용서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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