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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베 Aug 09. 2024

역전여관 마네킹

2 코털 생맥주

누구보다 먼저 마네킹을 걸고 넘어간 이는 코털 생맥주 ‘최’였다. 역전여관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바로 옆집인 생맥주 최가 마네킹을 트집 잡아 장사가 안된다고 앓는 소리를 해댔다. 노순우는 여관 문 처닫고 잠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행을 당한 사람한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생맥줏집 매상이 떨어진 건 노순우도 얼추 알아챘었다. 마네킹이 선 자리가 하필이면 코털 생맥주 출입문과 다섯 걸음이나 될까. 맥주 한잔하러 들어가려다가도 마네킹을 발견하면 손님들은 에이, 정초부터 재수 없게, 딴 데로 가자고 발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다.


 노순우는 생맥주 최가 야속했다. 방화살인 사건이 터지기 전만 해도 형님 동생 해가며 친동기간 부럽지 않게 잘 지냈었다. 별명이 코털인 생맥주 최는 이제 서른을 갓 넘은 쌩쌩한 청년이었다. 워낙 어리게 보이는 데다 가수 이장희를 좋아해서 일부러 코털을 길렀다는 그는 노순우를 ‘음악을 아는 형님’으로 알아모셨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출신임을 자랑해 온 그는 레드 제플린과 밥 딜런을 입에 올리는 노순우를 상조회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잘 따랐었다. 형님하고 음악 얘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던 생맥주 최가 역전여관 마네킹 때문에 손님이 줄었다고, 얼굴만 마주치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데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역전여관을 둘러싼 상가에 떠도는 뒤숭숭한 소문을 일찌감치 귀동냥했던 노순우로서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진 생맥주 최를 고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생맥주 최가 당구장 ‘강’에게 놀아나는 건가? 일 층을 곱창집과 부동산에 세를 준 삼 층 건물 소유주인 당구장 강이, 주변 상점을 사들여 건물을 신축하려고 벼른다는 건 상조회 회원이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악재가 발생한 건물을 매입해서 건물을 지으면 사업이 더욱 번창할 거라는 점쟁이의 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한 그 작자가, 역전여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노순우는 알고 있었다. 


날개를 펼친 독수리 대가리처럼 상가 한복판을 차지한 역전여관을 잡아먹어야 번듯한 신축 건물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당구장 강이 떠벌렸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사업구상에 동조하는 이들은 누구나 ‘최신식 으리으리한 삘딩’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점포를 하나씩 떼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나. 그걸 믿고 생맥주 최가 저리 나대는 걸까?      




“당신은 누가 커피 배달을 시켰는지 알아?”

대빗자루를 쓸어대며 노순우는 산 사람 대하듯 마네킹에게 말을 걸었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인파로 북적이는 출근 시간이 지나면 으레 해온 비질을 방화살인 사건이 터졌다고 해서 건너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기에 처할수록 역전여관은 언제라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노순우는, 여관 출입문 앞을 비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영업방침을 어길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마네킹 언저리를 쓸다 보니 그냥 무심코 나온 말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행여나 누가 봤다면 연탄가스 먹더니 마네킹과 속닥인다고 우세스레 여길지도 몰랐다. 김 양이 여자라고 해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쌍화차와 커피를 시켜줄 여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누라야 집에서 애들 둘 건사하느라 정신없을 테고, 여관엔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놨던 터였다. 요즘 당구장 강하고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도는 청자 다방 유 마담이 장난칠 리는 없고. 혹시 단골 투숙객 중에서 누군가? 했다가도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때맞춰 연탄가스 먹고 비실비실하던 순간에 전화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 따지고 보면 생명의 은인이랄 수도 있었다. 김 양이 조금만 늦게 왔다면 황천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네킹을 애물 덩이로 여기는 생맥주 최가 날이 갈수록 부쩍 시비조로 나왔다. 가게 문을 열다 말고 노순우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마네킹을 치워달라고 생떼를 썼다. 맥주 마시러 온 손님들이 싫어한다나.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찼는지, 하루가 멀다고 마네킹을 번쩍 들어 패대기치는 시늉을 하며 사람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어디 한번 해 봐. 마네킹에 손 하나 까딱했다간 당장 경찰에 신고할 테니.” 노순우가 대거리하자 생맥주 최는 가겟세 못 내면 형님이 책임지라고 삿대질을 해가며 불만을 토했다. 마네킹으로 골치를 썩이기는 생맥주 최보다 노순우가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을 거였다. 노순우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마네킹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려다 참는 사람 속을 몰라주는, 생맥주 최가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통기타를 등에 멘 생맥주 최가 출입문을 열어젖힌 뒤 대뜸 한다는 소리가 방화살인이 일어난 현장을 보여달라고 했다. 어지간해선 여관 출입을 안 하는 그였다. 노순우는 안 된다고 단박에 잘랐다. 생맥주 최는 여간해서 물러설 기미를 안 보였다.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겠다고 억지를 쓰는 데야 대책이 안 섰다. 가게 문이나 열라고, 거긴 출입 금지라고 타일러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마네킹 때문에 입은 손해가 막심하다고 눈을 부라린 그는, 형님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때아닌 상도의를 들먹였다. 상도의? 여기서 그게 왜 나오나? 노순우는 생맥주 최와 입씨름할수록 정나미가 떨어졌다. 위로는 못 할망정 손해를 배상하라니. 



“그나마 오는 손님들도 역전여관 방화살인 사건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신다니까요.” 생맥주 최가 말했다. “제가 기타를 치면서 ‘그건 너’와 ‘나 어떡해’를 불러도 박수는커녕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야유를 퍼붓는다니까요.” 노순우는 생맥주 최가 무슨 말을 주절대는지 알아먹지 못했다. 다만 손님들이 노래하지 말란다니, 가수인 그로서는 상심이 크리라는 짐작은 했다. 그걸 왜 역전여관에 와서 따지나? 언젠가 앨범을 내리라고 큰소리친 생맥주 최가 그 정도에 기가 질려서야 진짜 가수랄 수 있나. 


“형님, 손님들에게 노래가 안 먹히는 가수의 비애를 아세요?”

뜬금없이 생맥주 최가 진지하게 나왔다. 노순우는 방화살인 사건으로 타격받은 여관 주인의 비애를 아냐고 대꾸해 주려다 참았다. ‘산울림’이 신선하다, 아니다 뭔가 설익은 냄새가 풀풀 난다는 둥, 지미 페이지와 에릭 클랩턴 중에서 누가 세계 최고 기타 연주자인지를 놓고 입에 거품을 물었지, 가수의 비애를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형님이 알 턱이 있겠습니까? 음악이 뭔지도 모르는 술꾼들 상대로 노래하는 저 자신이 요즘처럼 비참한 적이 없더라구요. 노래 때려치우고 역전여관 방화살인 사건을 얘기해 달라는데 제가 미치고 팔딱 뛰겠다니까요.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가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요, 오동나무로 바닥 장식한 무대에서 노래할 거라구요. 마이크, 스피커 최고급으로 갖춰놓은 무대에서 노래할 거라 이겁니다. 그러자면 가게 확장 이전 해야지요. 적어도 홀이 백 평은 돼야 하고 무대만 다섯 평짜리 꾸밀 거라 이거죠. 조명발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하는 저를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멋집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그쯤에서 갑자기 생맥주 최가 애원조로 나왔다. 


“형님, 방화살인 사건 현장 좀 보게 해주세요. 그 여관방 얘기해달라는 손님들 등살에 제가 노래를 못 한다니까요. 형님, 우리 가게 매상 떨어진 거 형님 책임도 크다는 거 인정하시죠? 부탁합니다. 제발 방화살인 현장 구경 좀 하자니까요. 형님만 눈감아주면 몰래 혼자 들어갔다가 나올게요. 어제 손님들에게 약속했걸랑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무시무시한 방화살인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와서 실감 나게 썰을 풀어 주겠다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나가! 당장 나가!”

“아니, 형님 이러시면 안 되죠…” 노순우의 서슬에 기가 질린 생맥주 최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며 꿍얼거렸다. “매상 떨어진 거 책임지셔야…”

“꺼져! 안 꺼져! 당장 꺼지라니까!”

“연탄가스 마셨다더니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형님,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통기타를 끌어안은 생맥주 최가 뒷걸음질 치면서 주절거렸다. “형님, 방화살인 난 별채 건물 무허가인 거 아시죠? 형님이 그렇게 막 나가시면 저도 가만 안 있습니다. 마네킹 건드리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했죠? 좋다, 이겁니다. 저도 신고하겠습니다. 방화살인 현장 건물이 무허가라고 경찰에 신고하겠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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