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베 Aug 24. 2024

감옥의 안과 밖

직업혁명가

고상필은 S 자동차 파업 건으로 체포되면 감옥살이만 세 번째였다. 첫 감옥행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총학생회 부회장 출신인 그는 선배들을 따라 우연히 해고 노동자들 투쟁에 휩쓸렸다. 갓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일면식도 없었던, 해고 노동자들 투쟁 현장을 체험할 겸 호기심 반 따라나섰던 터였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도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화염병을 노동부에 투척했고, 그 사건으로 이년 육 개월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평전 작업 건으로 고상필을 처음 만나 이채로웠던 것은 그의 나이였다. 구십일 년 대학에 입학한 청년이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공장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들은 노동운동을 접고 각자 살길을 찾아 대학으로 돌아가거나 학원 강사로 취직하는데, 고상필은 거꾸로 고민 끝에 선택한 노동운동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그 독특한 이력에 끌린 나는 주저하지 않고 평전 작업을 결심했고. 


“졸업한 해 삼월쯤인가요, 막상 졸업했다지만 학생 물이 빠지기 전이잖아요. 사학 년 때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생운동 선후배들하고도 차츰 멀어졌고요. 막연히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확실한 진로를 못 정하고 고민만 직사하게 할 무렵이었어요. 좌로, 좌로 생각이 기울어가니 노동운동에 관심이 가는 건 자연스러웠지요. 아무튼 대학을 졸업했겠다, 인생행로를 어디로 잡을까, 오락가락할 땐데 날을 잡아 시골집에 갔더랬지요. 뭘 하려고 해도 어머니가 걸려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왜 아니겠어요? 졸업하고 취직해서 첫 월급 타면 뭐 해줄 거냐고, 고추를 따면서도 노래했던 어머니였어요. 


어려서부터 넌, 가장이다, 아버지를 대신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고요. 노동운동에 투신해야겠다고 결심할수록 어머니를 어찌 설득해야 좋을지 미치겠더라구요.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 어머니한테 뭐라고 말씀드리나? 직장 안 구하고 노동운동 하겠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말을 꺼내자마자 기절초풍할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더라구요. 평생 농사만 지으며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어머니시잖아요. 야, 이건 자식새끼로서 할 짓이 아니구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내 인생 설계를 어머니가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그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더라구요. 활동하다 보면 감옥에 갈 거 뻔하잖아요. 누구보다 어머니 맘고생이 클 텐데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 하나.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골머리를 싸맸지만, 답이 있을 리 없잖아요. …언제나 그렇지만 어머니는 어떤 장애물처럼 극복대상이 아니더라구요. 내 의지가 다다를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존재랄까…”


고상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그와 여동생을 키운 어머니였다. 

“…성대생 김귀정이 남대문 시위에서 깔려 죽고, 그 전에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에 맞아 죽는 사건이 터지고. 대학가가 시위로 몸살을 앓았잖아요. 열사들 죽음이 잇따르고. 이른바 분신 정국이 벌어지잖아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신입생인 저로서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지요. 입학하자마자 수서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잖아요. 동아리 방에서 선배들이 쇠 파이프 드는 걸 보고 그날로 시위에 합류했지요. 


그렇게 시작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앞뒤 분간 못 하던 그때, 어떤 선배를 통해 덜컥 해고 노동자들과 연결됐던 거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갈 것인가, 노동운동에 바로 투신할 건가, 제 딴에는 인생 최대 난관에 부닥쳐 씨름하는 나날이었어요. 군이라고 해 봤자 육 개월 방위였어요. 근데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화염병 타격 투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도 학생 딱지 겨우 뗀 운동 초짜가 이년 육 개월을 살고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죠. 그야말로 화염병 타격 투쟁이 내 고민을 단박에 날려버린 거예요. 머리에 쥐 나도록 고민했던 게 어찌나 우습던지. 내 인생의 이정표였던 거죠, 감옥행이.”


고상필 입에서 오래전 감옥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다니, 뭔가 이상했다. 감옥생활을 아무 데서나 입에 올릴 고상필이 아니었다. 더구나 까마득한 세월 저편 일이 아닌가. 나는 그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다. 

“이때 웃기는 게, 총여학생회 회장 여자애와 연애했거든요. 근데 운동에 집중하자고, 나중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어요.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어리더라도 어찌 그리 꽉 막혔던지. 그 친구한텐 두고두고 미안하더라구요. 그 친군 제 갈 길을 잘 찾아가서 다행이긴 하지만(훗날 유명 여배우가 된 그 여학생은 감옥에 갇힌 고상필 후원회 회장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철딱서니 없을 나이라 해도, 인간이 덜 된 탓일 거예요. 생각하면 모질게도 칼같이 갈라섰거든요. 인정머리 없는 건지 어리석은 건지 하여간 그 덕에 감옥 갈 결단을 내렸지만요. 그 일 겪고 깨달았죠. 인생엔 나중은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잠시 침묵했던 고상필이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결기가 안 생기네요.”

결기가 안 생긴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다른 말로 하면 투쟁 의지가 약해졌다는 소리 아닌가. 직업혁명가는 현실을 변혁하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켜켜이 다진 인간이 아닌가. 물론, 혁명가라고 해서 전향하거나 변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사회주의권 몰락이 몰고 온 후폭풍이야 고상필이 진작 생생하게 겪었을 터. 그 무렵 얼마나 많은 노동운동가가 전향 선언을 했던가. 우리가 아는 20세기 혁명사는 그 파란만장한 역사 못지않게 변절자로 넘치지 않던가. 그러나 고상필은 노동운동에서 발을 빼겠다는 포기 선언을 한 게 아니었다. 


고작 결기가 안 생긴다고 패잔병처럼 우물거리지 않나. 직업혁명가 인생에 어떤 균열이 생겼음을 엄살 부리듯 털어놓지 않나. 내 앞에 앉은, 스스로 주절댔듯 기가 꺾인 남자는, 내가 알던 고상필과 확실히 달랐다. 직업혁명가라고 해서 언제나 강철 같은 의지로 현실을 타파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고수할 만큼 나 또한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상대가 고상필이라면 달랐다. 고상필에게 ‘자본에 만신창이가 된 현실’(입버릇처럼 되뇐)은 깨고 나아가야 할 장벽이지 고단하다고 쓰러져 쉴 안식처가 아니었으니까. 고상필은, 피곤하다고, 힘이 빠졌다고, 슬럼프에 빠졌다고 민낯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성진테크 공장 점거 투쟁을 잊은 걸까. 고상필은 고난에 처할 때면 언제나 그 일을 떠올리곤 힘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용역 깡패와 경찰이 새벽에 ‘공장을 침탈한다’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공장을 빠져나가기로 한 그날 밤, 열 명씩 조를 짠 조합원들은 어둠 속을 뚫고 공장을 떠나 피난 길에 올랐다. 목표 집결지는 O 시 K 자동차 사외 기숙사. 반대하는 조합원들도 많았다.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뭉치기 힘들다, 처절히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장을 사수하자고. 


그러나 조합원 피해가 막심할 것이고 파업 투쟁이 물거품 될 것을 우려한 지도부는 퇴각을 결정했고. 이튿날 고상필은 K 자동차 사외 기숙사 옥상에서 지회장과 함께 조합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반만 돌아와도 성공이라는 둥 이십 프로도 안 도착할 거라고 걱정을 토로하는데, 조합원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차량 상품명을 딴 K 자동차 사외 기숙사로. 공사 중인 고속 철로를 걸어서, 산을 타 넘고, 국도를 걸어서, 굶어가며 조합원들이 속속 기숙사 정문으로 들어섰다. 점심때까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조합원 백오십팔 명이 약속한 집결지로 다들 모였다. 기적이었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상필은 노조 지회장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조합원들을 향한 그 벅찬 감동을 되새김질하며 이날까지 버텨왔다던 고상필이 아닌가. 그는 그날의 기적을 잊은 걸까.

고상필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직업혁명가도 인간임을 잠시 잊었던가. 그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기대를 했던가. 그래서 희로애락을 지닌 인간이 아닌 빛바랜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혁명가로 그를 대했던가. 직업혁명가란 피도 눈물도 없는, 온갖 고난을 돌파해 낼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는 성진테크 파업 건으로 두 번째 감옥생활을 일 년 팔 개월 했다. 분신한 지회장 죽음을 가슴에 품고 그는 감옥살이를 견뎌야 했다. 이제부터라도 고상필을 직업혁명가란 철갑을 떼어내고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라고 해서 감옥살이가 달가울 리 없을 터였다. 직업혁명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했다. 이년 육 개월을 채운 첫 감옥살이를 생각하면 그는 할머니를 잊지 못할 터였다. 원주교도소에 있을 때 농사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면회를 왔다. 하나뿐인 손자를 가로막은, 투명 플라스틱 방벽을 사이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를 그는 외면하지 못했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할머니 눈물은 못 견디겠더라구요.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건 인간의 의지나 신념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세계에요. 사람인 이상, 그 앞에서는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무력하기 짝이 없어요. 그야말로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더라구요.” 

안양교도소에 있을 때 전두환을 특별대우하지 말라고 싸우다 징벌방에 갇혔던 그였다. 시체를 태우는 냄새를 없애려고 삼겹살을 구워 먹은 사형수들을 알았던 그가, 할머니 눈물 앞에서는 무장해제당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토로하고 있었다. 할머니 눈물을 입에 올린 그가 작심한 듯 말했다.


“솔직히, 이번엔 감옥 가기 싫네요.”

아뿔싸, 그래서였구나.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고상필이 이 말을 하려고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구나. 직업혁명가 입에서 감옥 가기 싫다는 고백을 듣다니. 노동운동을 하면서 쌓인 피로감이 누적된 것일까. 거듭 밝히지만, 직업혁명가라고 해서 밥 먹듯 감옥을 드나들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직업혁명가 고상필 인생에 위기가 닥친 것일까. 


나는 고상필이 직업혁명가의 길을 섣불리 포기하지 않으리라 여긴 터였다. 그런데 뭔가 꺼림칙했다. 하필이면 왜 나였을까. 왜 내게 털어놓은 걸까. 그는 어엿한 노동자해방연대 조직원이지 않나. 혁명적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하는 동지들이 있지 않나. 일찍이 그가 이렇듯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매사에 노동운동가임을 잊지 않은 고상필이 아닌가. 평전 취재 과정에서도 그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파업 투쟁을 내게 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초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사건과 대화 하나까지 꼼꼼히 챙긴 그였다. 그가 인간관계를 사무 처리하듯 풀어가는 꽉 막힌 인간이란 뜻이 아니다. 그의 고백이, 직업혁명가란 외피를 걷어내고, 인간 고상필을 드러낸 듯 편안한 건 어쩐 일일까.


“선배님, ‘그 안에선’ 편지가 가장 기다려지는 거 아시죠?” 굳었던 고상필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좀 전에 감옥 가기 싫다고 했던 그가 아닌가. 뜻밖의 반전에 뜨악해하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약속한 편지 꼭 보내셔야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감옥의 안과 밖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