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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호 Sep 08. 2023

공간의 재발견 : 작가의 방

1부 문화중독자의 서재 

  


   서울 성북구, 내가 태어난 지역이다. 집에서 언덕길 위로 한참을 올라가면 신세계가 펼쳐졌다. 이모네를 포함해서 말이다. 농구장 절반만 한 마당이 있던 이모네 단독주택에서 가장 부러운 공간은 서재였다. 양장본이 채워진 서재의 주인은 이모부였다. 말수는 없지만 묵묵히 나를 챙겨주던 인물이었다. 봄날은 간다. 도산으로 그의 회사가 문을 닫자 이모네는 미국이민의 물결에 합류한다.  


   타국에서 생을 마친 이모부의 기억은 늘 서재와 함께였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방 서재를 꾸몄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창문 양쪽으로 책장을 넣었다. 자주 읽는 음악서적, 글쓰기 참고서인 에세이, 대학원 시절에 구입한 문화이론서, 그리고 역사서와 인물서를 배치했다. 다른 장르의 책은 구석방에 보관했다. 올해 라면박스 20여 개 분량의 책을 처분했지만 여전히 서재는 용량초과다. 


   요즘 10대는 책 대신 유튜브로 정보를 흡수한다. 그 중간지대에 인터넷이 있다. 20세기 지식의 보고였던 책의 위상이 좁아졌다. 유행보다 취향에 익숙한 탓인지 책에 대한 내 관념은 여전하다. 글감이 떠오르면 책에 먼저 손이 간다. 무색무취한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는 마지막 선택지다. 정보는 넘치고 지식은 제한적이다. 그 중심부에 책이 위치한다.  


   내게 서재는 집필과 음악감상의 집결지다. 모든 글은 서재에서 쓴다. 노트북이 있지만 외부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 서재라는 작은 도서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와 음악감상은 늘 함께다. 알다시피 음악이란 형체가 없기에 상상력의 촉매제로 그만이다. 퇴고를 거듭하는 글쓰기처럼 음악도 다양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음을 감수해야 하는 외부에서 글쓰기란 먼 나라의 이야기다.   


  애니미즘(Animism)이란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 이 용어를 책에 대입해 보자. 책 보관소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도서관을 예를 들어보자. 이곳은 시큼한 책향과 함께 찌든 머릿속을 정화해 주는 기운이 흘러넘친다. 책공간이 제공하는 애니미즘의 현장이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처럼 서재란 유색 유취한 사색의 정원이다.


   지난여름에 대대적인 서재정리를 했다. 책상과 멀리 위치한 책은 자주 손이 가지 않는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독서마저 멀어진다. 때문에 서재도 적절한 물갈이가 필요하다. 관심 가는 책을 다시 책상 근처로 재배치한다. 내게는 책정리도 독서의 일부분이다. 행여나 책이 훼손되지 않도록 운반에 주의를 기울인다. 분명한 것은 서재에 정성을 기울이면 서재도 화답을 한다는 사실이다.


   서재의 가장 큰 변수는 공간의 제약이다. 책욕심을 가로막는 현대판 빌런인 셈이다. 바닥까지 책을 쌓아놓을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매일 쏟아지는 신간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더라. 타협이 필요했다. 책도 물고기처럼 방류하기로 결정했다. 아쉽지만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행위다. 책장의 빈자리는 다른 책으로 채운다. 비움이 있기에 채움이 가능한 법이다. 


   언제까지 서재에서 글을 쓸 수 있을까. 작가 장정일은 50대 중반부터 독서에 신중을 기했다. 시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시기다. 독서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인간의 시력과 지력은 유한하다. 독서와 글쓰기를 병행해야 하는 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거친 들판에 푸르른 소나무처럼 서재형 인간으로 남고 싶다. 하지만 미래를 알 수는 없다. 결국 지금에 충실한 삶이 차선이다.   


   글을 쓰다 지치면 서재를 둘러본다. 그렇게 우물에 빠진 독서의 기억을 끌어낸다. 동시에 글에 관한 생각을 뒤집어본다. 내 고정관념에 생채기를 내는 시도다. 음악 장르도 수시로 바꿔본다. 그래도 어렵다면 서재를 잠시 떠나본다. 서재의 소중함을 반추하는 행위다. 이 모든 행위를 담아 글이 만들어진다. 만약 서재가 아닌 장소에서 글을 썼다면 다른 논조의 책이 나왔을 것이다.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파우스트처럼 순순히 영혼을 저당 잡힐 수는 없다. 갈수록 인간의 역할이 쪼그라든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인류에게는 서재라는 문명의 대안이 존재하니까.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덤이다. 서재가 우선이다. 서재가 만들어지면 일상 자체가 달라진다. 그 지식의 완성체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합류시켜 보자.   

 


< 공간의 재발견 : 작가의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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