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열린 사색의 세계
갈월동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헌책방이 즐비했다. 고등학교 수업을 일찍 마치는 토요일 오후면 그곳으로 향했다. 몇 시간을 죽치고 책을 읽어도 눈치를 주지 않던 책방주인들이었다. 월간지와 소설을 좋아하던 어리숙한 학생의 주머니 사정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반나절을 헌책방에서 보내다 해 질 녘에야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는 서울역 근방에 헌책방이 없다.
대학시절에는 갈월동에 새로 생긴 <고래서적>이랑 신용산역 근방의 <뿌리서점>에 자주 갔다. 신간서적을 사기에는 부담스러웠고 입고한 헌책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모든 책은 헌책이라고 했던가. 중고책방 탐방가 최종규 작가의 말처럼 독자에게 책이 쥐어지는 순간 새책과 헌책의 경계가 사라진다. 요즘 <고래서적>은 도로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겨 신간 중고서적을 함께 판매한다.
야근에 주말근무가 이어지던 신입사원 때는 헌책방을 자주 가지 못했다. 원하는 책을 구해도 정독할 짬이 부족했다. 30대에서야 다시 헌책방을 찾았다. 소설을 쓰는 선배랑 대학가의 헌책방을 주로 탐방했다. 1988년에 개업한 <온고당>이 우리의 단골이었다. 책방서가의 절반에 이르는 소설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서점은 월드컵북로로 이전했고 요즘은 국내외 잡지를 주로 취급한다.
본격적인 헌책사냥은 대학원에 입학하던 40대부터였다. 전공과목이 정해지면 수십 권의 관련 서적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신촌지역의 헌책방을 주로 찾았다. <공씨책방>과 <글벗서점>이 그곳이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책방은 <숨어 있는 책>이었다. 클래식이 흐르는 가게에 스며드는 햇살을 등지고 책을 찾는 즐거움을 아는가. 배낭 가득 책을 넣어 책방을 나서는 포만감도 빼놓을 수 없다.
헌책방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대형 헌책체인점이 전국에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좋은 책을 선별해서 구입하는 체인점에 사람들이 몰렸다. 헌책방으로 가던 책이 거대기업의 그물망에 포획되었다. 등급별 헌책정가제라는 시스템이 결정적이었다. 주인의 눈대중으로 가격을 매기던 헌책방의 전통이 벽에 부딪쳤다. 원하는 중고책을 홈페이지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함도 영향을 끼쳤다.
노포를 동네사랑방처럼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문화가 존재한다. 여기에 전제가 따른다. 수십 년간 가게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하는 헌책방이 늘어만 갔다. 프랑스처럼 서점 임차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인증제가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히 <숨어 있는 책>은 지금도 오후 1시면 가게문을 연다.
동교동 골목길에 있던 <숨어 있는 책>은 예전보다 3배가 넘는 규모의 지하로 위치를 옮겼다. 예전처럼 햇살이 드리워지는 일은 없지만 장서가 늘어났다. 이곳에서 구한 애장목록 1호는 <아트록> 음악계간지 창간호다. 일본의 음악덕후들까지 구하려 하는 잡지를 발견했던 날을 기억한다. 1992년 봄에 출간한 창간호를 15년 후에야 손에 쥐었다. 이 잡지는 장터에서 정가의 20배가 넘는 가격에 판매된 적이 있다.
<숨어 있는 책>에 갈 적마다 시사주간지 <시사IN> 과월호를 챙겨 왔다. 서점운영자가 정기구독하던 <시사IN>은 2006년 <시사저널>의 재벌그룹 기사보도 탄압사태로 인해 해고된 기자들이 만든 잡지다. <시사IN>은 2007년 창간 당시 영국 <인디펜던트>와 일본 <슈칸킨요비>로부터 축하메시지를 받는다. <시사IN>의 모토는 ‘정직한 사람들이 만든 정통 시사주간지’다.
1999년에 생긴 <숨어 있는 책>을 운영하는 노동환 사장은 출판계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 30년 가까이 책과 관련한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서점은 예술, 문학, 인문사회과학 관련서를 중심으로 운영한다. 그는 과거 파주 출판단지에 <숨어 있는 책> 2호점을 냈었지만 지금은 신촌 본점만 유지한다. 노대표가 가장 아끼는 책종류는 영화와 서점 관련서라고 밝힌다.
그는 설날과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활을 서점에서 한다. 애서가로서의 자부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습관이 더 소중하다는 말을 남긴다. 졸업장이 필수아이템이 된 초경쟁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지만 독서의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다. 삶에 지칠 때면 헌책방에 가보자. 그곳에는 말없이 당신을 반기는 사유의 공간이 펼쳐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