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이력서 제2탄 벤처기업 편이다. 내가 1탄 대기업 편에서 얘기한 현대건설(IMF 이후 현대엔지니어링은 현대건설과 통합되었다. 지금은 다시 분리된 걸로 안다.)을 그만두고 소위 말하는 닷컴회사, 즉 벤처기업으로 회사를 옮긴 때가 얼추 2000년이었을 게다. 국내에서 1위를 하던 그룹이었는데도 IMF라는 전대미문의 태풍에 휘청거리더니 근본 없는 계열사통합이며 급여삭감이며, 암튼 이러저러한 회의감이 들 무렵 스카웃제의가 왔고 난 주저 없이 사표를 던졌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퇴사의사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다음 날, 부장님은 어디서 구하셨는지 '대기업직원들 퇴사 후 벤처기업 이직 후회해'(대충 이런 제목이었다)라는기사가 실린 신문을 아무 말 없이 뻘쭘히 앉아있는 내 책상에 집어던지고 가셨다. 나름 역할을 하고 있던 부하직원이었고, 학교선배기도 하셨던 부장님은 나를 참 아껴주셨는데 아쉬움을 그렇게 표현하셨던 거다. 우연히 얼마 전 신문 인터뷰기사에서 중견건설회사의 대표이사로 재직하시는 걸 지면으로 뵌 적이 있다.
우여곡절을 겪고 옮긴 벤처기업은 소위 말하는 '닷컴회사'였다. 인터넷 네트워크를 보안하는 방화벽제품을 주력으로 하는 회사였는데 회사이름이 '싸이버텍 XXX'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99년, 2000년 당시에는 밭에서 고추 매던 아주머니도 IT회사면 쌈짓돈을 싸들고 묻지마 투자를 할 때여서 회사이름이 아주 중요했다. IT회사라는 걸 무조건 티를 내야 하는 터라 닷컴이니 사이버니 텍이니 하는 단어가 꼭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회사이름에 하나만 들어가도 묻지마투자를 받던 시기이니 '싸이버텍 XXX'는 사이버와 텍이 두 개나 들어간 지금 생각하면 완전 대박 사명이었던 거다.
그래서인가? 주당 500원이었던 주가는 내 기억으로는 한 번의 액면분할을 거쳐 암튼 수십 배(수백 배였나?) 뛰어올랐다. 직원 30명 남짓의 중소기업의 시가총액이 믿기지 않겠지만 그 당시 현대자동차 시가총액 보다 높은 때도 있었다. 직원들은 이렇게까지 오를 줄 모르고 오블리제를 실현한 오너 덕분에 액면가로 우리 사주를 받아 모두가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다.(사장님은 나중에 이렇게까지 오를 줄 몰랐다고 고백하셨다.ㅋㅋ) 데스크에서 인포를 맡고 있던 20대 여직원은 30억 원을 벌었다고도 했고 자동차매장에 가서 고급차를 바로 현금으로 결제하고 구매했다고도 하고 암튼 다양한 무용담을 본인들에게 직접 사실로 확인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웬걸, 직원들이 서로 갈등이 없더라. 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더라. 다른 회사와의 협력을 논의하는 회의를 할 때 정말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여차하면 그냥 그 회사를 그냥 인수할까?'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그 당시 태동하던 프로게이머 구단을 창단하는 프로젝트도 상당히 진행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전설처럼 회자되는 99년~2000년 닷컴버블은 내가 직접 겪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거다. 난 모든 직원들이 잔치를 끝내고 입사를 했으니까. 위에서 얘기한 걸 부럽게 보기만 듣기만 하는 주변인이었다. 물론 그 뒤에도 그 회사가 투자한 다른 닷컴회사에 같이 투자할 기회를 받고 실제로 투자도 했지만 닷컴열풍은 그야말로 뜨거운 속도로 닷컴버블이 되고 말았으니까. 난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되는 걸 현장에서 목격하는 종군기자의 역할이었을 뿐이다. 조금 더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자면, 옮긴 회사의 직원스펙은 그리 높지 않았다. IMF가 오기 전에는 나름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많이 뽑을 때라 웬만한 대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 취업이 가능했고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은 원하는 곳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밀려밀려 간 곳이었으니까. 물론 일반론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앞서 쓴 글처럼 길목을 지키는 혜안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겠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 8~9십 프로 이상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으로 부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열이 확 받는 것이 담배가 땡기는 시점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벤처열풍, 닷컴열풍은 닷컴버블이라는 귀여운 비유어로 급속도로 뭉개져 버렸다. 높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받았던 스톡옵션은 그걸 팔아 분당에 집을 샀다는 누군가를 제외하고는 못 판 사람들의 비명으로 슬픈 종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버블은 커녕 장난감 비눗방울도 만들기 힘든 시기가 도래했다.
나의 경우는 특별히 우리 사주나 스톡옵션으로 덕을 본 사람이 아니다 보니 충격이 덜했지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빨리 팔 걸 하는 후회와 탄식이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암튼 이제부터는 실력과 좋은 제품으로 승부해야 하는 진짜 벤처, 어드벤처의 시대가 온 것이다.
난 첫 벤처회사가 IT 보안회사이다 보니 이후 옮긴 회사들도 자연스럼게 보안 관련 솔루션을 취급하는 회사가 되었다. IT벤처회사는 크게, 제품을 개발하는 연구소와 그 제품을 영업하는 기술영업본부, 그리고 판매한 제품을 설치하고 수행하는 전략사업본부로 나뉜다. 나의 기나긴 기술영업의 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보안솔루션은 재밌다. 온라인상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컨텐츠를 다 다룬다. 그게 문서파일이든 미디어파일이든 가리지 않는다. 난 어떤 회사에서는 연예인화보 컨텐츠를 보안하는 제품의 기술영업을 했고 또 긴 시간 동안 문서파일(아래한글, MS오피스 파일을 비롯한 모든 문서파일)의 보안을 취급하는 DRM 기술영업을 했었다.
벤처기업의 흥미요소 중 하나는 회사를 키워서 코스닥에 등록시키느냐 아니냐이다. 창립초기부터 같이 해 온 사람들에게는 예전 닷컴버블 때까지는 아니어도 스톡옵션이나 우리사주 등의 명목으로 목돈이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코스닥등록회사 직원은 은행 대출금리도 우대를 받는다. 오랫동안 재직했던 회사가 코스닥등록에 성공해 기쁜 적도 있었는데 그때 경쟁사였던 곳은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코스닥 등록이 안된 날은 강남술집들 술은 그 회사직원들이 다 마신다는 우스개 소리도 하곤 했었다.
대기업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벤처기업의 사내 분위기는 자유로운 게 맞다. 또 직원들의 학벌이나 지연, 학연 등의 올가미도 상대적으로 옅다. 가끔 사장님의 친척 또는 지인의 아들이 어느 날 직원이 돼있는 경우는 있지만 그 사람의 능력이나 실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가 많다.
다만, 대기업이 더 그럴 거 같지만, 벤처기업이 오히려 오너 입김이 너무 강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특히 코스닥에 등록이라도 하면 초심을 잃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수백억의 자산가가 되고 회사자금에 여유가 생기면서 외부의 인사가 영입되면 오너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흔들리게 되고 그로 인해 회사가 위기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로 날개를 달아 성장하는 회사도 많다.
벤처기업은 상대적으로 이직률도 높다. 경력이 쌓이면 독립을 하거나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이직을 하는 직원들이 생겨난다. 나의 경우도 내가 가진 커리어와 인맥, 영업사이트 등을 가지고 직급과 연봉을 점프하여 몇 군데를 옮겨 다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이직을 하는 것은 모험이더라. 체급이 높다 보니 옮기는 회사에서는 나에게 주는 돈만큼 당연히 내가 역할을 하길 바라고 영업사원에게 그건 곧 영업실적을 의미하니까.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마치 대학 때 도서관 자리를 잡지 못해 자리를 옮겨 다니는 메뚜기라고 불리던 사람들처럼 이직의 간격이 짧아지기도 한다.
아무튼 벤처기업은 내 직장생활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내 영업사원으로의 정체성을 만든 시기였기에 가장 소중한 기억이다. 거기서 만난 모든 사람들과 고객사, 그리고 사건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보면, 그리고 추억해 보면 후회보다는 그리움의 감정이 앞선다. 참 치열하게 그리고 낭만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그때 함께했던그 사람들에게도 내가 그런 기억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벤처기업 편을 마친다. 다음 3탄은 사회적기업 에서의 재밌는 에피소드로 찾아올 예정이다. 기대해도 좋다.
사족 : 내가 다닌 회사 중 '파수닷컴'이라는 곳은 얼마 전 사명을 '파수'로 변경했다. 닷컴은 이제 진짜로 추억이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