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_내가 없는 선택을 했던 나
나는 구체적인 직업의 꿈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을 행복하게 지내다 보면 나중에 그냥 잘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씩만 나의 상황에 맞춰 잠깐의 직업적 꿈을 그렸다.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되면 의사가 되고 싶었고 농구 드라마인 마지막 승부에서 멋진 장면을 봤을 때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다. 현실에 맞춰 조금씩 바뀌긴 했다. 내가 피와 수술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의사 대신 한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 순간뿐이었고 그뿐이었다. 40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보면 꿈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심지어 대학을 간다는 목표도 없었다. 이 때문이었을까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선생님 몰래 수업시간에 친구들이 가져온 만화책을 보거나 딴짓을 했다. 이때 만화책이 좋아 만화가를 꿈꿨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10대는 친구들과 희희덕 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었다.
20대가 되어 의무 교육 기간은 지났고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라다녔다. 20살이 되는 날 주변 친구들은 전부 대학에 진학했다. 나도 따라서 대학에 갔다. 고등학교 공부는 꼴등에 가까웠기 때문에 성적이 필요 없는 전문대에 입학했다.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지내다가 나이에 떠밀려 군대에 갔다 왔다. 전역 이후 유일하게 갈 곳은 학교뿐이었다. 1학년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띄엄띄엄 학교를 다녔고 가까스로 졸업했다. 그리고 이제는 갈 곳이 없었다.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으나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그때 너무나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편입에 대한 생각은 없었지만 그 친구를 따라다니기 위해 같은 학원을 등록했다. 끝날 때 같이 집에 가기 위해서 지루한 수업 시간을 버티고만 있었다. 그쯤 내가 좋아하던 아이는 여자친구가 되었다. 1년 후 추운 겨울 당연히 여자 친구는 합격을 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사라졌다. 나는 홀로 공부를 시작했다. 여름쯤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여자친구를 우연히 보았다. 여자친구는 남자 선배와 팔짱을 끼고 웃으며 걷고 있었다. 나는 스쳐가는 모든 감정을 참고 못 본 척 그 옆을 지나갔다. 결국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이 사건은 나를 미친 듯이 좋은 학교에 가고 싶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이듬해 봄, 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나는 꽤 괜찮은 대학의 경제학과에 합격을 했다. 새로운 학교의 같은 과 친구들은 행정고시, 회계사 등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전의 나로 다시 돌아갔다. 과거 학교를 다녔던 것처럼 대강대강 학교를 다녔다. 졸업까지는 2년이나 남아있었다. 매번 다른 친구들과 매일 술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달갑지 않은 졸업이 다가왔다.
나는 갈 곳이 없는 31살 취업준비생이 되었다. 직업을 구해야만 했다. 주변 친구들처럼 은행이나 증권사를 목표로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다르게 학교 성적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급하게 CFP, 투자상담사 등 이름이 그럴듯한 금융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렇지만 나이와 성적을 생각하지 않은 나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꿈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취업 자체가 전부가 되었다. 공고가 나오는 모든 회사에 지원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100개쯤 썼다. 그리고 유일하게 면접을 보게 해 준 제조업 중견기업에 취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과분한 회사였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였지만 1년쯤 지나 그만두었다.
나 스스로에게 그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다니게 된 직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회사 밖으로만 나오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와 없다시피 한 경력이 나의 전부였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면 행복하겠지. 노량진으로 가자.” 그리고 길거리에서 컵밥을 먹기 위해 경쟁하는 수많은 수험생 중에 한 명이 되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고 싶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가져오고 싶었다.
2년이 넘는 수험기간을 겪은 뒤에 9급 공무원,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처음 맡은 업무는 주민센터에서 등초본 서류를 발급하는 것이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많은 사람들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긴 대기에 날카로워진 사람들은 늦는다고 소리를 질렀고, 발급 수수료 1,000원이 비싸다며 항의를 했다. 전쟁터 같았다. 반복되는 단순 업무와 억지 부리는 민원인과의 다툼에 지쳐갔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나의 현실을 보았을 때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연차가 쌓이며 업무는 바뀌었고 어려워졌다. 때로는 주변의 칭찬과 완성된 성과에 으쓱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업무만 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학창 시절과 달라진 것은 본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발전이라면 발전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사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래도 단 한 가지는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방치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의 상태를 분석했다. 평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 공무원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저 직장으로서 먹고 살 빠듯한 생활비를 가져올 뿐이었다. 사람들이 공무원에게 바라는 직업적 소명감은 없다. 물론 장점도 있다.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정년까지 다닐 수 있다. 또한 업무로 경쟁하지 않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소소한 행복이 있다. 그러나 잘 살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정쩡했다.
나에게 일은 그냥 일인 것으로 하기로 했다. 직장시간 외에 남아 있는 시간인 오후 6시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고민을 아무리 해봐도 결론은 잘 사는 것이다. 부자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상상했을 때 보이는 휴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상하다 느낄 만큼 파란 하늘과 후덥지근한 공기 향기가 있는 휴양지에 내가 있다. 해변에 펼쳐져 있는 썬베드에 반쯤 누워있다. 그리고 호텔 캘리포니아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짭짤한 맛이 느껴지는 마가리타를 주문한다.
이런 작은 행복을 찾아가기로 했다. 즐거운 미래를 위한 구성 요소들이 집안 곳곳에 있었다. 멋진 동네 아티스트를 꿈꾸며 구매한 베이스기타는 먼지가 쌓쳐있는 채로, 부자가 되길 바라며 구입한 주식책은 뒤집어진 채로 숨어있었다.
“미루지 말자.”
숨바꼭질을 하듯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는 의미를 가진 것들을 찾아서 하나씩 하기로 했다. 그렇게 어릴 적 스쳐갔던 작가라는 꿈을 찾았다. 1달 전부터 시작한 글쓰기는 벌써 행복을 가지고 오고 있다.
현재의 생활에서 플러스알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구체적인 목표를 갖지 못하고 일시적 즐거움을 쫓아다녔다. 철없던 20대는 물론 40대가 시작된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언젠가는 직업을 바꾸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직업이 가장 큰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꿈이 생길 때까지는 해내지 못했던 목표를 찾아다닐 것이다.
박명수 어록이 생각난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정말 늦은 것이다. 그러니 당장 시작해라.’
가만히 있으면 꿈을 실현할 수 없으며 행복해질 수도 없다.
방치된 삶은 이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