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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hbluee Nov 10. 2024

어머님은 푸딩이 싫다고 하셨어

파르페는 싫다고 안 했다

 우리 집엔 사자님이 계신다.

 사자. '사춘기 자녀'의 줄임말이다.

 원래 사자는 하루종일 잠을 잔다. 그리고 허기가 들면 사냥을 한다. 우리 집 사자도 주무시다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달라 하시는데, 오늘은 재미가 고프셨나 보다. 침대에 이불 덮고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시느라, 목이 앞으로 쭉 빠지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훑으며 도파민을 사냥하신다. 사자가 거북이로 진화하는 순간이다.


 얼굴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기 일쑤에, 방문도 늘 닫혀 있던 아이였다. 밥도 심지어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더라. 가끔은 내가 무슨 간수인가 싶었다. 그렇게 자발적 죄수를 표방하던 그녀와 면회 한 번을 하려면, 여간 힘을 기울여야 되는 것이 아니었다.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나마 몇 마디라도 던져 준다.  어쩌다가 한 번 오픈해 주신 핸드폰 알고리즘을 빠르게 훑어보니, 그 당시 그녀의 취향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문화로 관심사가 옮겨가고, 그중 가장 궁금해했던 것 중 하나가 일본식 푸딩이었다.


이거구나

 다음부터 할 말이 있으면 푸딩을 사 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어김없이 굳게 닫힌 성문이 열렸다. 마치 문지기에게 뇌물을 바치듯이 말이다. 그렇게 가끔 조공을 바치고서야 성의 공주님을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푸딩은 일본만화에서 나왔던 모양은 아니었기에 아마도 성에 차지 않았으리라.

 

 나 역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다. 딱 저 나이 때 나도 저 아이처럼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었지. 그래서 더더욱 애니메이션 화면에서 보이는 그대로의 푸딩을 눈앞에 가져다주고 싶었다. 무언가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것이 어미의 본질이 아니던가. 검색을 해보니 잠실 송리단길에 그녀가 깜빡 좋아 죽을 만한 장소가 있었다. 마치 일본에 사는 친구의 방에 놀러 가는 것 같은 컨셉의 카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카페에서 파는 메뉴에는 늘 먹어보고 싶다던 아이스크림이 한 스쿱 올라간 메론소다에, 캐러멜 소스가 줄줄 흐르고, 생크림이 얹혀있고, 그 위에 빠알간 체리 한 개가 화룡점정처럼 올라가 있는 노란 푸딩이 있었다. 층층이 생크림과 과자와 초콜릿이 빼곡하게 쌓여있는 화려한 파르페까지 포함해서 그 비주얼이 정말 아이가 보던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마침 딸아이가 다니는 한약방이 그 카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약 지으러 갈 때도 되었겠다, 그 김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사진을 보여주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가보겠다고 고개도 끄덕였겠다. 오래간만에 뭔가 공유할 만할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이버 지도의 도움을 받아 송리단길 골목골목을 누벼 구석에 있던 카페를  간신히 찾아냈다. 지하로 내려가니 상상치도 못한 세계가 펼쳐져있었다. 몇 개의 구역으로 장소를 나누어 놓았는데,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인 친구의 방, 그 친구집의 거실에서 열리는 타코야키 파티장, 일본 어느 골목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잡화점 등의 컨셉으로 꾸며놓았다. 이런저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 상품들도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전시해 놓고 팔고 있었다. 심지어 한 편에 무심한 듯 걸어 둔 유카타는 입어 볼 수도 있었다.  오래전, 서랍에 깊숙이 넣어놨던 보물들을 소중히 꺼내어 전시해 놓은 듯, 너무도 흥미롭고 새로워 호기심이 생기는 공간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친구네 집에 놀러 온 것 같다!

큰 아이는 덤덤하게 들어오더니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구경한다. 그러더니 생각보다 슴슴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 스윽 앉아버린다.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내 팔을 붙들어 당기며 수다스럽게 '엄마 이것 좀 봐, 만화에서 봤던 거야, 우와, 이것도 좀 봐바. '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반응과 꽤나 온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주문한 음식을 보면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뉴사진을 몇 번이고 확인했기에 자신이 있었다.

 자, 봐. 네가 그렇게 먹어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푸딩이야!

 

일본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메론소다, 파르페. 푸딩.


 새침한 딸아이 얼굴에 가득 미소가 띄워져 있는 것을 상상하며 주문한 음식을 테이블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검색해 봤던 인터넷에서 본 사진과 정말 똑같은 화려하디 화려한 모습이었다. 이 비주얼이면. 아까 못 들었던 말을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려버리고 말았다. 함박웃음은커녕, 입꼬리 한쪽조차도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큰 아이와 다르게 둘째는 신이 났다. 연신 '우와, 우와'를 연발하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돌려가며,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 바로 저 반응인데. 옛날 딱 둘째 저 나이 때 큰 아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큰 아이는 무심하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툭툭 찍더니. 메론소다를 마시며 푸딩을 수저로 떠서 맛본다. 그러더니 다시 눈빛은 핸드폰에 고정. 손가락은 다시 바쁘다. 아침에 침대 위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닌데


"그렇게 좋아하던 푸딩이잖아."

"어때, 예쁘지? 맛은 괜찮아? 맛있어?"


그래도 속으로는 좋았겠지. 연신 반응을 살피며 기웃대듯 물어보았다. '응, 맛은 있네' 한 마디라도 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아이는 쿡쿡 찔러보듯이 던진 질문들이 꽤나 귀찮았나 보다. 틱틱거리며 오히려 살짝 짜증을 내는 말투로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말한다.


"아, 그만 물어봐."


쿵.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단단히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또한 내가 생각했던 답변이 아닌데. 다정한 한마디가 뭐람. 무뚝뚝한 한 단어조차도 들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이 카페를 발견하고 우리 딸이 얼마나 좋아할까 상상하며, 한약방과 이곳의 거리를 계산하고, 주차할 곳을 찾고. 주변에 밥 먹을 곳까지 찾아두며 꼼꼼히 준비했다. 무슨 메뉴를 시켜줄까.. 역시 오리지널 푸딩이 좋겠지? 초코 맛은 어떨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고민하고 설레이기 까지 했던 내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너무하네. 그냥 신이 난 것은 나였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부채춤까지 추고 있었구나.


 나는 푸딩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너를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엄마 덕에 맛있는 것을 먹었잖아. 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 왜 그렇게 심드렁해. 심지어 나한테 짜증까지 내고. 아. 정말 너무하다. 무정한 너.

 

 원망스러운 마음이 뭉글뭉글 올라왔다. 내 기대는 싸늘히 식어버렸다. 알록달록했던 눈앞의 풍경들은 회색빛으로 변해버렸다. 기껏해야 열몇 살 짜리 애한테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네게 닿고 싶어서 한 나의 간절한 애씀은, 네 무심한 한마디에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렸다. 그렇게나 달콤했던 푸딩이 이제는 내 입안에서 씁스름해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처럼 서늘해진 설렘을 뒤로하고, 무심한 반응을 담담히 주워 담으며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어둑해진 도로를 달린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기쁨으로 인한 떨림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서운한 마음이 한 번 더 밀려온다.


 할 수 없지. 다정한 한 마디 따위를 기대하다니 어리석었다. 이내 체념하며 다시 고개를 거둔다. 그래도 그릇은 싹싹 비웠잖아. 그래. 맛있게 먹은 걸로 알자. 애를 썼던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말을 해 본다.


기운이 빠지니 졸음이 밀려왔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간이 안 된 음식처럼, 싱겁디 싱겁게 끝이 나는 듯했다.


띠링

 

핸드폰 알림이 울린다. 무심코 손가락을 올려 화면을 본다. 새 글 알림이다.

어라, 우리 딸 인스타 스토리가 새로 올라왔다. 얼른 열어 확인해 보니, 오늘 갔던 카페에서 먹었던 푸딩, 메론소다, 파르페 사진이 아무 멘트 없이 터억 올라와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뒷자리를 돌아본다. 이 녀석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열심히 눈을 파묻고 보던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아이의 인스타 스토리를 열어 보고서는,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띠링 띠링 알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겨우 십 대 후반 아이다. 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힘껏 표현하는 경험이 적어, 서투르지. 이 한 장의 사진에는 많은 단서가 담겨 있었다. 물에 젖거나, 빛에 비추어야 보이는 글씨처럼. 아이의 마음을 보려면 한 겹의 시선이 더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편지를 볼 수가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 덕에 궁금했던 푸딩을 먹었어요.

엄마가  소개해주셨던 그곳이 정말 좋았어요.

또 가고 싶어요.

사랑해요 엄마.


너는 기어코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대겠지만, 나는 알아냈다. 너의 마음속 깊은 구석에 숨어있던 이 말들을 내가 발견해 냈다. 엄마니까, 볼 수 있었다. 엄마니까.


 나지막이 답신을 읊조린다. 나도 사랑해요, 우리 츤데레 따님. 다음번에는 따님이 좋아하시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도시락을 만들어 볼게요.


 이렇게 너를 사랑할 구실을 하나 더 만들어서, 가슴속에 내 멋대로 저장해 두고 오늘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해 본다. 어둑해진 창 밖의 가로등 불빛들이 어름어름 네 얼굴을 비쳐준다. 곤히 잠든 네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져가는 걸 일렁임 속에서 얼핏 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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