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기타 Jan 03. 2024

우리 동네 남의 동네

눈 치우기

  초임 관리소장 때의 일이다. 그때 관리소장 근무 시 참고가 되리라는 생각에 동대표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주민의 관점에서 단지 내의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또 살기 좋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위해 소소하지만,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막상 주된 논의가 비용 절감에 우선하는 방향으로 무게를 두고 있어 아쉬움도 있었다. 대신 아파트 운영과 관리비가 어떻게 어떤 절차를 거쳐 결정되며, 이견 발생 시 이를 어떻게 조율해 가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어 단지 관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임기 만료에 따라 이제는 근무지 관리에 전념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첫눈치곤 많이 내린 1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발코니에서 내다본 놀이터에는 밤새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다니기 전 저 눈을 치워야 제설작업 하기도 쉽고 통행에도 불편이 덜할 텐데 하는 생각 끝에 동대표 임기 종료 기념 및 평소 인사를 주고받는 미화원 아주머니 수고를 좀 덜어드리자는 생각에 눈을 치우기로 작정하였다. 두툼한 상의에 모자 하나 눌러쓰고 초소에 있는 밀대와 빗자루를 골라잡고 놀이터로 갔다.  

  놀이터 구조가 위에서 보면 숫자 8의 모습과 같이 위는 좀 작고 아래는 불룩 나온 오뚜기 모양이다. 전철역을 이용하는 주민들에겐 놀이터를 가로질러 가야 하기에 그 동선에 따라 통행로를 낼 요량으로 심호흡 후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눈을 치우는 동안 미화원 아주머니의 고맙다는 말과 지나가는 이웃들로부터 ‘수고하신다’라는 인사말에 더더욱 힘을 내어 한 시간 정도 쌓인 눈을 밀고 쓸어내기를 한끝에 'ㅅ'자 형태의 통행로 두 군데를 놀이터 출입구와 연결하였다. 눌러쓴 모자 위로 김이 모락모락, 땀에 젖은 내의는 등에 착 달라붙었다. 혹시나 눈을 치우는 모습으로 본 다른 주민이나 새로 선출된 신임 동대표라도 나와서 거들 줄 알았으나 희망 사항이었다. 빗자루를 미끄럼틀 기둥에 세워놓고 하얀 입김과 함께 가쁜 숨을 골랐다. 아침 운동으론 평소보다 과했으나 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결과물에 흡족해하는 순간 ‘아차, 근무지 아파트에도 눈이 많이 쌓였을 텐데…. 내가 왜 남의 동네에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곤 곧 혼자만의 웃음을 지었다.  


  퇴직 후 주택관리사로 재취업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발령받으면 열심히 하겠노라고 다짐한 게 어디 나뿐일까만 사는 아파트가 남의 동네 같고, 근무지 아파트가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마음이 들 줄이야 나도 몰랐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과 소장 부임 첫날의 초심이 아직은 남아 있다는 일말의 자족감과 함께 이런 게 직업병인가 하는 생각에 미소와 함께 웃음이 나온 것이다.


  다음날 출근해서 어제 제설 작업하느라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과 함께 어제 일을 얘기했더니 반장이 ‘소장님도 이제 우리 아파트 사람이 다 되셨다.’ 하며 같이 웃었다. 마침 사무실에 들른 대표회장께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나도 이젠 어엿한 우리 아파트 주민으로 인정받았다며 어제 일을 얘기했더니 소장님이 우리 아파트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며 고맙다고 했다.


  어디서든 자기 하기 나름이다. 풍부한 지식과 경륜으로 주민들의 신망을 받는 선배 소장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으나 초임답게 열심히 일하며 부족한 점 하나하나 채워 가다 보면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발령 전 현장실습 때 조언해주신 선배 소장님의 당부가 생각난다. 500명의 주민이 사는 곳이면 천 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일해야 한다고…. 그 당부 오래 지니도록 노력하리라. 바라건대 그 소장님 계신 곳이나 근무지 모두 이번 겨울 잦은 눈 폭탄 없기를 소망해 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