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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Dec 14. 2024

만약에

선택

   '주홍 글씨', '큰 바위 얼굴'로 친숙한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데이비드 스완의 줄거리다. ‘스완이라는 청년이 일자리를 구하러 길을 가던 중 나무 아래에서 잠깐 단잠에 빠졌다. 그가 잠을 자는 동안 백만장자가 될 기회, 예쁜 처녀와 결혼할 기회, 강도에게 죽임을 당할 고비가 있었으나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떠난다.

  일생을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세 차례 정도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큰 사고를 당하거나, 많은 부를 얻거나 또는 명예나 신분의 상승, 어여쁜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기회 등이 내게도 있었 것이라는 부정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가 나도 모르게 지나간 경우라면 크게 아쉬워할 도 없다. 반면에 내가 알았거나, 내 선택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아쉬움이 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한 십 년만 젊었으면,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하는 말은 친구나 지인들과 한 번쯤 나눈 적이 있을 것이다. 현재 상황에 빗댄 과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수년 전, 칠순 초반이었던 누님의 고향 친구 모임에서 같은 얘기를 나눴다고 하길래 결과가 궁금했다. 예상과 다른 의외의 결과였다.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아는 분이라 현재의 생활이 남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님을 안다. 그런데도 '얼마 남지 않은 삶인데 그냥 지금처럼 살다 가겠다.' 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으로 얻는 것보다는, 녹록지 않은 삶을 반복하기 싫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만약에 그때 지금의 남편이 아닌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하는 상상 자체가 부질없고 또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누렸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로움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인간이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것이 불과 반세기 전이다. 인류가 출현한 후, 그때까지 이룩한 문명의 발전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더 큰 발전을 이뤄냈다고 한다. 그 급속한 문명의 발전과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온 일 또한 만만치 않은 삶이었다. 재래시장, 마트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대신 주머니 속 핸드폰에 손가락 몇 번의 놀림으로 문 앞까지 배달받는 세상이며 식당, 극장도 말로 주문하는 대신 조작이 쉽지 않은 키오스크, 발권기를 이용해야 한다. 전화로 치킨을 주문하거나, 택시를 손으로 불러 세우는 대신 손가락 놀림으로 대신하고 있다. 은행을 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발품을 파는 대신 손가락 놀림으로 일상의 대부분을 해결하고 있다. 이런 첨단의 문명과 기술과 친해지면 시간도 절약되며 편리한 점은 있으나, 발품을 파는 게 손가락 놀림보다 몸에 익은 아날로그 세대가 아닌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 어떻게 변화할지 모를 최첨단 문명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활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묻고 또 물어야 하며 굳은 손가락 마디를 놀려야 하는 삶이 썩 내키지 않는다. 또 그 선택을 했다 한들 편안한 삶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백 년도 못 되는 인생길에 온갖 희로애락을 겪어야 하는 삶이란 고행이기에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그런 삶 속에서도 가꾸어온 현재의 삶이 내가 꿈꾸었던 이상과 차이는 있으나, 내 모든 것을 다하여 이룬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삶이기에 그 선택을 마다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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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경우는 어떨까? 나보다 아내의 선택이 궁금하다. 평생 월급쟁이 남편 뒷바라지에 물질적 풍요보다 절제된 삶을 꾸려왔다. 나이 오십이 넘어 아내와 다투지 않는 것도 그런 아내의 삶을 이해한 다음부터다. 별것도 아닌 일에 내 주장만 내세우기도 했으나 이겨 본 들 소득도 없었고, 결국 나만 손해 보는 일임을 뒤늦게 깨달은 점도 있다. 

   구순이 넘은 장인, 장모님 수발에 십 년 세월을 훌쩍 넘긴 아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처럼 가끔 넋두리하며 고충을 토로한다. 그때마다 내 부모인데 어떡해. 나중에 후회나 아쉬움이 덜 하도록 하는데 까지 할 수밖에.’ 오랜 세월 되풀이되는 내 말에 별로 공감하는 기색도 없이 쳐다보는 아내의 눈길이 오늘따라 싸하게 느껴진다. 혹여 그 눈길 속에 '만약에, 그때 당신 말고 딴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은 가사 도우미 한두 명쯤 두고 살 팔자인데.'라는 속마음이 담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위축되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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