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사람에게 예감이란 게 있어서일까. 월급쟁이 꽃이라는 임원으로 승진하여 준법감시인을 거쳐 감사실장으로 재직 중이던 임원 5년 차였던 그해 초여름부터다. 출근 후 지정 주차구역에 주차 후 스무 명 남짓 직원이 있는 나만의 업무공간에 도착하기까지 5분여. 그 짧은 시간에도 불현듯 앞으로 이 생활이 얼마나 더 지속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계약만료 통보를 통보받은 날은 금융감독원 정기 검사가 진행 중이었다. 성과급 도입을 둘러싼 노사 간의 이견과 첨예한 대립으로 시작된 노조의 파업 행위가 장장 8개월간 지속된 후, 노사 양측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이 회사에 커다란 상처만 남긴 채 봉합되었다. 보호받아야 하는 고객의 권익이 무시된 파업이었기에 금융감독원은 소비자 보호라는 명분으로 예정된 검사를 앞당긴 것이다.
검사 2주 차 월요일이었다. 상사에게 검사 진행 상황과 2주 차 수검 대응 계획 보고를 마쳤다. 잠깐 남으라는 말에 부장을 내보내고 마주 앉았다. 한 달 후인 임원 계약기간 만료 시 연장되지 않고 계약이 종료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노조 파업으로 이완되고 흐트러진 회사 분위기 쇄신 방안의 하나로 임원 인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최장기 근속 임원이었기에 내가 퇴직 일 순위임은 예견하긴 했으나 내심 세 번째 계약 연장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는 직장은 아니다. 5년 전, 최선임 부장에서 임원이 된 후 최장기 근속 임원으로 재직하며 다음 임원 인사가 있는 경우 내가 1순위 퇴직 대상이 될 것임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상사에게 알겠다 하고 검사가 진행 중이니 끝날 때까지 언급하지 말아 달라 하고 일어섰다.
인사 임원으로부터 회사의 퇴직 임원에 대한 예우 프로그램 설명과 퇴직에 따른 퇴직금 등 몇 가지 사항을 들으며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맴돌았던 퇴직이란 현실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자, 이젠 어떡해야지, 무엇을 해야 하나, 직원들에겐 언제 말해야 하나.’ 등 잠시 생각하다 다시 검사장으로 갔다.
직책상 대관업무를 담당하였기에 금융감독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간 친하게 지내 온 몇몇 검사원과 검사와 관련한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막상 퇴직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언급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검사 종료일을 맞이했다.
장장 9개월여 걸쳐 전개되었던 성과급 도입을 둘러싼 노조의 파업이 노사 쌍방 간 쉽게 아물지 않는 큰 상처를 남긴 채 봉합되었다. 회사는 파업 중 해사 행위자, 단순 가담자를 가려 이동 및 사면 등의 인사조치와 함께 그간 이완되고 가라앉은 회사 분위기 쇄신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해야만 했다.
정기 검사가 종료된 다음 날 사장과 마주 앉았다. 흐트러진 회사 분위기 쇄신과 빠른 경영정상화를 위해 조치인 만큼 계약만료 결정에 대한 이해와 양해를 구했다. 언제까지 회사에 있을 수는 없지 않냐며, 그간 회사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은 만큼 회사에 감사하다며 화답했다. 배석한 인사 담당 임원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다해 드리라는 사장의 말을 뒤로한 채 사장실을 나왔다. 직원들에게 퇴직하게 됨을 통보하고 전 직원들과 점심을 했다. 서로 마음이 편치 않은 입장이기에 서둘러 자리를 끝냈다. 열아홉 이후 내 삶의 일 순위였던 직장생활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돌이켜 보면 행복한 36년간의 직장생활이었다. 고졸 사원으로 입사하여 좋은 상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조언과 배려로 대학을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사내 장학생으로 대학원을 수료하고 해외 연수도 다녀왔다. 아내도 회사에서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월급쟁이 꽃이라는 임원도 되었다. 참으로 내 삶과 떼어 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회사였다. 그런 회사와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에 우리 회사란 개념보다 내 회사라는 주인의식으로 최선을 다하려 했다. 나름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돌이켜보면 좀 더 잘할걸 하는 아쉬움이 크다.
퇴직 후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주택관리사 자격을 취득하고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두 번째 직장생활을 이어가며 그때와 판이한 환경임을 깨닫는 순간마다 그때가 내 삶의 화양연화이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다시없을 순간이라는 점을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음이 아쉽기만 하다. 10대 끝자락에서 50대 중반까지 내 삶의 절반이 넘는 세월을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일하다 퇴직하였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이며 감사한 일이랴. 이를 허용해 준 회사와 그 긴 세월 동안 비빌 언덕이 되어주신 많은 상사와 선배 그리고 고락을 함께한 동료,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