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이었다. 연말까지 처리해야 하는 월별 일정을 점검하다 불현듯 이달 말이면 월급쟁이 50년이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50년이라…. 반세기 세월이다. 잠시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1970년대 초반 고졸 사원 신분으로 발령을 받았다. 상고 출신으로 주산과 부기를 안다는 이유로 경리과 수습사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첫 직장에서 36년을 재직하고 2000년대 후반, 직원들의 환송 속에 퇴직하였다. 한 직장에서 그 장구한 세월 동안 근무할 수 있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요즘 같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퇴직 후, 안정된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한 지 1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적지 않은 나이에 월급쟁이 50년을 맞이함은 축복이다. 건강한 육신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반세기 직장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건강한 유전인자를 물려주신 부모님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입사한 무렵은 월남전 와중으로 불과 몇 년 전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 부근까지 내려왔던 국내외적으로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시절이었다. 오일달러를 앞세운 중동의 건설 붐으로 많은 건설 노동자가 열사의 땅 중동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모래바람과 싸웠고 파독 간호사, 광부로 이역만리 독일의 병원 영안실과 1,000미터 지하 갱도에서 우리 누나와 형들이 눈물과 두려움을 참아내며 번 돈을 고국으로 송금하던 시절이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정착한 둘째 누님은 70년대 초 파독 간호사, 10여 년 전 고인이 된 매형도 파독 광부의 일원이었다. 누님이 독일로 떠난 다음 해, 50년 직장생활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재직하는 동안 열 명의 CEO가 바뀌었고 고졸 수습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임원 신분으로 퇴직하였다.
수습 기간 급여는 정상 급여 33,000원의 70%였고 한 직급 위인 선배 사원의 급여가 44,000원이었다. 기혼자는 최소 50,000원은 받아야 한다며 넋두리하던 선배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처럼 급여가 은행 계좌로 이체되지 않고 잉크로 급여 명세를 적은 누런 봉투로 받았다. 첫 번째 월급날, 선배 조언에 따라 당시 명동 입구 M 백화점에서 어머니 빨간 겨울 내복 상하의 한 벌과 백화점 내 서점에서 영영사전 한 권을 샀다. 그때 첫 월급으로 산 영영사전은 아직도 책장 한쪽에 꽂혀 있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은 좋은 상사들 덕분에 야간부 대학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회사의 장학생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초급간부 시절, 미국 맨해튼의 뉴욕 보험대학에서 4주간 단기 연수와 재보험 거래가 있는 미국 L 보험회사에서 실무 연수를 받는 혜택까지 누렸으니 내가 할 일은 오직 회사에 충실하고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었다.
육상과 해상 운송업이 주력사업인 모기업은 세계 일주 노선사업은 출범한 지 1년 만에 맞이한 IMF 위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그룹 해체 위기를 맞이하였다. 결국 보유 계열기업 중 재무구조가 견실한 회사를 매각하여 금융 차입금을 상환해야 하는 구조조정 단계에 이르러 재무구조가 견실한 우리 회사가 매각되었다. 창사 50년을 목전에 둔 국내 두 번째 생명보험사가 하루아침에 뉴욕증시 상장을 추진 중이던 다국적기업의 일원이 된 것이다. 회사 매각을 전후하여 단행된 구조조정, 명예퇴직으로 선배를 비롯한 많은 동료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났다. 다행히 그 파고를 피했으나 그들의 몫과 빈자리를 메워야 함은 남은 자의 몫이었다. 달라진 환경 속에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선배, 상사 역할을 해야 했기에 집보다 회사를 우위에 두고 40대의 후반을 보냈다. 그리고 몇 년 후 임원이 된 후 5년 임원 생활을 끝으로 36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것이다.
50 중반에 퇴직을 맞이했기에 퇴직 후의 생활 방편 마련이 시급하였다. 가족여행도 미룬 채 무엇을 할지 고민하였다. 관리직 경력을 가진 이가 많았기에 재취업은 바늘구멍이었다. 헤드 헌터사를 통한 면접도 특별한 경력과 기술이 없었기에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중장비 기계 조종사 자격 취득을 시작으로 동 제련 최종 부산물인 페로(Ferro) 샌드 납품사업, 욕실 리폼 사업, 등받이 없는 의자 대리점 등을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한 채 빈손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 직장 경력만큼 사업과 기술 부문에서의 경력자가 많은 분야에서의 그들과 경쟁은 무리였다. 뒤늦게 사업과 기술 분야는 나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평생 관리직으로 종사했기에 그 경력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를 다시 찾아 나섰다. 그러다 주택관리사 고시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하루 10시간에서 15시간을 책과 씨름했다. 그 인고의 세월 6개월 후 취득한 주택관리사 자격증으로 지금의 직종에 종사한 지 벌써 십수 년이다. 그 세월 동안 6개월의 공백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월급쟁이 생활 50년이 넘었으니 장구한 세월임은 틀림없다.
월급쟁이 50년을 넘어 나이 칠십에 이른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이 생활을 잘 마무리하려고 한다. 업계 입문 전후로 정보 부족으로 헤맸던 경험에 비추어 비록 개인적 경험에 불과한 것이나 글로 정리하고 두 번째 수필집에 담으려 한다. 나와 같은 길을 모색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파트 관리소장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