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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Sep 12. 2023

콩나물 심부름

열 살 소년의 고민

   어릴 적 소소한 집안 심부름은 막내인 내 몫이었다. 동네에 있는 두부 공장에서 가져간 양은 냄비에 두부, 비지를 사 오는 일, 양계장에 가서 달걀 한 꾸러미 사 오는 일, 뛰어가면 5분 거리인 시장에서 두부, 콩나물 또는 같은 반 친구 부모님이 하시는 기름집에서 소주병에 담은 참기름을 사 오는 일, 기원에 계시는 아버님을 저녁 드시라 모셔오는 일 등이었다. 이 중 잦은 심부름은 저녁 밥상 차림에 올릴 국거리로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 오는 일이었다. 평소 어머니가 시장에 가실 때 잘 데리고 다니셨다. 난류와 한류가 마주치는 바다를 접한 지역이라 시장에 가면 크기가 제각각인 다양한 종류의 생선과 해산물 외에도 싱싱한 제철 과일이며 어떤 날은 바구니에 담겨 새 주인을 기다리는 토끼와 강아지 등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사주시는 떡이나 튀김 같은 군것질거리로 주전부리를 할 수 있었기에 시장가는 일은 익숙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로 기억한다. 어머니가 백 환을 주시며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사 오라 하셨다. ""하는 대답과 함께 어머니가 주신 백 환을 손에 쥐고 골목길을 한달음에 내달려 시장에 도착했다. 콩나물 파는 곳은 시장 어귀에 늘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곳에는 할머니 몇 분이 두꺼운 종이상자를 한두 겹 접어 깔고 앉아 머리에 이고 온 콩나물 항아리를 세숫대야 크기만 한 다라 위에 막대기 두 개를 가로질러 올려놓고 그 옆의 따로 차린 나지막한 작은 상 위의 대나무 채반에 수북이 담은 콩나물을 팔고 있는 내겐 익숙한 장소였다. 콩나물 할머니가 앉아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나는 그날따라 어느 할머니 앞으로 가서 콩나물을 달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콩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가 세 분이셨고 콩나물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할머니들 앞으로 가면 세 분 모두가 날 쳐다보며 자기의 콩나물을 사라고 할 텐데 그러면 어느 할머니의 콩나물을 팔아드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분의 콩나물을 팔아드리면 두 분의 할머니는 분명 아쉬워하실 거고 콩나물을 판 할머니의 콩나물은 키가 줄어드는 데 비해 자신의 콩나물은 그대로이므로 서운한 생각을 하게 될 테니 그것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콩나물을 사러 왔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콩나물을 사러 온 것을 할머니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딴청을 부리며 어느 할머니 콩나물을 팔아드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콩나물을 사러 온 낌새를 알아차리면 틀림없이 내게 콩나물 사라고 권하실 테고 그 할머니 앞으로 가면 나머지 할머니들의 눈길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콩나물 손님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세 분 중 어느 한 분에게만 다가가 콩나물을 달라고 말을 꺼낼 뱃심이 없었다. 할머니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그리하면 되겠다.‘   

  

  할머니들은 작은 바가지로 솟아오른 콩나물 위로 연신 물을 뿌려가며 오가는 사람에게 콩나물 사라고 권하고 계셨다. 그러던 중 아주머니 한 분이 콩나물 할머니 앞을 지나가려다 맨 끝에 앉은 할머니 앞으로 가 콩나물을 달라고 했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나도 얼른 나머지 두 분의 할머니 앞에 가서 할머니 한 분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할무이요, 콩나물 오십 환 어치만 주이소' 하고 옆의 할머니에게도 할무이도 오십 환 어치 주이소라고 했다. 첫 번째 할머니는 '분명 나한테 콩나물을 달라고 했는데 왜 옆집에도 콩나물을 달라고 하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내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자 알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웃으며 말했다. '우야꼬나, 나도 팔아주고 옆집 할무이도 팔아줄라꼬 그랬나. 우째 그런 생각을 다했노. 참으로 고맙데이'라고 하셨다. 두 분의 할머니가 담아주신 콩나물을 받고 할머니 한 분에게 백 환을 드리며 나누시라 했다. 몇 번의 경험에 비추어 종전의 백 환 어치보다 양이 많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린애가 마음 쓰는 게 기특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더 담아주신 것이었다. '고맙데이. 다음에도 오너라, 또 많이 주꾸마. 조심해 잘 가거래이' 하시는 두 분 할머니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밀린 방학 숙제를 한꺼번에 다 한 듯한 후련한 마음으로 집으로 내달렸다.


  저녁밥을 짓고 있는 어머니께 콩나물 두 봉지를 내밀었다. 콩나물 봉지가 두 개인 것이 의아스러운 듯 물어보시려는 어머니에게 사정을 말씀드렸다. 얘기를 다 들으신 어머니가 '어째 콩나물이 많아 보인다 했더니 할머니들이 더 담아주신 모양이다'하며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곧 저녁 먹어야 하니 밖에 나가지 말고 손 씻고 들어가라하시며 물에 헹궈 낸 콩나물을 주시며 누나하고 같이 콩나물 꽁지를 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항상 콩나물 꽁지를 떼고 국을 끓이셨다. 그날 저녁 아버님 귀가 후 내가 심부름한 콩나물로 끓인 국으로 저녁을 먹었다. 적당량의 고춧가루, 다진 마늘. 적당한 크기로 파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콩나물국에 고추장을 약간 풀어 얼큰한 맛으로 먹었다. 아삭한 식감을 느끼며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말기도 하며 맛있게 먹었다. 식사 중 내가 심부름 다녀온 일을 전해 들은 아버님은 말없이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시곤 식사를 계속하셨다. 나도 칭찬을 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아버님처럼 고추장을 풀은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날 밤, 큰방과 붙어있는 누나들 방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이 들 무렵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게 그런 생각을 했다니 기특하다'라는 어머니 말씀에 아버지도 '그렇다' 하셨다. 두 분의 얘기를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시주받으러 오는 스님에게 밥공기 하나 가득 쌀을 담아 건네시며 합장으로 배웅하시던 모습, 일주일에 한 번 아침밥을 먹는 시간에 밥 동냥 오는 거지 아저씨에게도 한 번도 밥이 없다 하지 않고 밥을 나눠주셨고 남은 밥이 없을 땐 드시던 밥그릇의 밥이라도 조금 덜어 주시던 모습, 여름철에 집 앞을 지나가는 엿장수 아저씨의 메리야스 상의가 찢어져 등이 훤히 드러난 모습에 엿장수 아저씨를 불러 세워 안방 서랍장의 아버님 내의 몇 벌을 보자기에 싸서 바꿔 입으라며 건네주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란 우리 남매들이다. 무심하게 넘겨도 그만인 이웃의 어려움에 어머니는 작으나마 베풀려 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자애로움이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집에서 직접 키운 콩나물을 무거운 항아리째 머리에 이고 와 시장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푼돈이나마 벌어보려는 마음을 헤아리는 일쯤이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한 분에게만 콩나물을 사면 옆의 할머니가 서운하실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인데.’ 하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요즘은 그 시절과 달리 먹을게 풍부해서인지 콩나물국으로 밥을 먹은 기억이 오래다. 오늘따라 콩나물 심부름하던 그 시절과 어머니가 생각난다. 아내에게 콩나물국을 한 번 끓여 달라고 해야겠다. 심술궂은 장마가 끝나면 두 분이 누워계시는 파주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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