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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Oct 12. 2023

파주 가는 길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다 파주에 계신다. 아버님은 2007년, 어머님은 2015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셨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한겨울만 빼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뵙는다. 누워 계시는 곳에 도착하여 '저 왔습니다. 그동안 잘 계셨어요?' 하며 인사를 드려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예전엔 '너 왔구나, 얼마 전에도 다녀갔는데 또 왔니? 직장 다닌다고 너도 피곤할 텐데 하루 쉬지 않고 뭐하러 또 왔니?" 하시면서도 두 손을 잡으며 반겨주시던 그 모습 눈에 선하고 그 목소리 귀에 쟁쟁하건만 두 분 모두 이제 말씀이 없으시다. 그저 그렇게 반겨주셨으리라 생각하며 저 아래 편의점에서 사 온 막걸리와 좋아하시던 바나나 우유와 커피 우유를 종이컵에 가득 채워 정한수 삼은 생수와 함께 상석에 차린 후 두 번 절을 올린다. ‘아버님, 어머님 덕분에 식구들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젠 자식 걱정하지 마시고 두 분 편히 계세요.’ 하며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렇다 할 여가활동이나 취미활동이 없기에 두 분을 찾아뵙는 일이 내겐 소일거리이며 산행이다. 요즘 같은 늦가을이면 계신 곳 주변의 떨어진 낙엽을 주워내고 옹벽 위 소나무, 벚나무 아래에 가꾼 화단을 손보려 몇 차례 오르내린다. 화초 위의 낙엽을 걷어내고 키 자란 잡초를 뽑고 휘어진 화초에 지지대를 세워 준다. 싣고 온 물통의 물을 물뿌리개로 목마른 화초와 화단에 듬뿍 뿌려주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이 방울져 얼굴로 흘러내린다. 몸을 움직이고 온몸의 근육을 써야 하기에 산행에 버금가는 건강관리 수단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100번 도로를 거쳐 자유로까지 30여 분, 다시 자유로를 따라 북쪽으로 한강과 임진강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또 30여 분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조금 넘는다. 가까운 아차산, 봉화산에 비하면 멀기는 하나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니 발걸음은 가볍다. 쉬엄쉬엄해도 서너 시간, 어떤 날은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얼마 전엔 한 달 일정으로 귀국하는 독일 누님의 방문을 앞두고 미리 이곳에 들렀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전날 화원에 부탁해 놓은 국화꽃을 찾아와 화단에 옮겨 심고 가을 가뭄으로 목이 마른 화초와 화단에 물을 흠뻑 뿌려주고 주변을 정리하고 집에 오니 평일의 퇴근 시간이었다. 주말 하루를 산소에서 근무한 셈이다. 맑은 공기 속에 가끔 찾아와 동무해 주는 뻐꾸기, 산까치와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을 따사로운 가을 햇살 속에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치 한 폭의 정물화 속에 내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연이 주는 더없는 아늑함과 고즈넉함이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고 마음마저 정갈해진다.     

  농부의 발걸음 소리에 벼가 자라고 곡식이 영글듯 이곳 또한 찾는 이의 발걸음에 비례하여 모양새가 다르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마음만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 한둘이랴. 두 분 계신 곳도 마찬가지다. 오른쪽 이웃은 가끔 발걸음하는 자손이 있어 무성하게 자란 풀이 방치된 경우가 그리 오래 가지 않으나 왼쪽 분은 좀 다르다. 작년 여름 근 한 달 만에 찾아와서 깜짝 놀랐었다. 20여 호가 나란히 있는 이곳의 초입에 들어서며 몇몇 집 위로 우산 키만큼 자란 억새와 웃자란 잡초 모습에 섬뜩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마치 인적이 끊어진 외진 곳의 폐가와 같았다. 왼편 이웃도 그중 하나였다. 그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한 모습을 없애려 수북한 억새와 웃자란 잡초를 뽑아내느라 한참을 씨름했었다. 주변을 청소하고 화단에 물을 몇 차례 뿌려주면 부슬부슬한 흙이 물을 머금어 촉촉해 보이는 모습이 마치 곱게 화장한 여인네 얼굴 같아 마음이 한결 흡족해진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힘을 잃을 무렵 이미 사그라든 향과 향로 주변의 재를 닦아내고 딱히 상차림이라 할 것도 없는 우유며 음료수 담은 컵을 비워 담아온 봉투에 도로 담는다. 물기 어린 상석을 깨끗이 닦고 다시 두 번의 절로 작별을 고하며 다시 자식 걱정일랑 마시고 두 분 편히 계시라는 인사말로 그날의 산행을 마감한다.     

     

  유난히 비가 잦았던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며 오가는 길 주변의 풍광도 계절 따라 변한다. 더없이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자유로를 따라 흐르는 한강과 임진강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반겨준다. 아침 바다에 반짝이는 윤슬만 아름다우랴, 서산에 지는 해님의 잘 자라는 인사 같은 은은한 햇살에 찰랑거리는 강물의 윤슬도 그에 못지않다. 그런 강의 모습을 바라보면 차분해지는 마음과 함께 잡다한 상념 또한 사라진다. 국화꽃 색상보다 짙은 황금색 들판이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져 올해의 농사도 어김없는 풍년임을 알려준다. 노란 국화꽃이 지천으로 핀듯한 황금 들녘이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진다. 몇 차례의 태풍을 이겨낸 농심에 대한 보답일까 올해도 어김없는 풍년임을 예고하고 있다. 매년 이맘때면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교하리 통일전망대를 지나 일산대교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임진강 하늘을 가로질러 남으로 비행하는 철새 무리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겨울 초입이면 'ㅅ'자 형태의 무리 비행을 하나 요즘은 비스듬한 ‘-’자 형태로 비행을 하고 있다. 장거리 비행을 앞두고 새로 맞이한 식구를 위해 비행 훈련을 하는 것이리라. 분단의 현실을 일깨워 주는 길게 뻗은 철조망 상단에 ‘철새 도래지’, ‘경적 금지’ 표지판이 붙어있는 지역의 하늘 위로 예닐곱 마리의 무리 비행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앞으로 한두 번 더 오가다 보면 그동안의 비행 훈련으로 온전한 'ㅅ'자 형태의 대열을 갖추어 머나먼 남쪽 나라까지 쉼 없이 날아가는 철새 무리를 보게 되리라.      

   그들이 떠난 후 동장군이 찾아오면 그들의 비행 모습을 비춰주며 잘 다녀오라 배웅하던  두 강도 두꺼운 겨울옷을 준비할 것이다. 화단을 놀이동산 삼던 들고양이, 청설모, 다람쥐, 두더지와 부모님 곁을 지켜온 노란 국화꽃도 동면에 들면 부모님 찾아뵙는 내 발걸음도 뜸해지리라. 첫눈과 함께 적막이 파주에 내리면 부모님 또한 긴 겨울잠을 주무시다 내년 봄 찾아뵙는 내 발걸음 소리에 깨어나 반겨주시리라.  파주를 오가는 이 길은 매번 마음의 안식과 평화로움을 선물해 준다. 내년 봄 화단 가장자리에 영산홍과 철쭉을 더 심어 꽃 울타리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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