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같은 포근한 날씨에 아직 겨울인가 싶다. 겨울 시작과 함께 첫눈으론 많이 내렸던 그때 외에는 포근한 날씨를 친구삼던 눈 손님도 한동안 찾아올 기미가 없다. 새벽녘 겨울 하늘 별빛 본 지 오래고 간혹 흐려진 모습에 눈이 오려나 쳐다보는 하늘엔 뿌연 미세먼지만 가득하다. 한 가지 걱정은 덜었으나 다른 하나의 걱정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예전보다 빈도가 잦은 미세먼지와 불청객 황사로 희뿌연 하늘을 마주하는 일이 이제는 별로 새삼스럽지 않다.
겨울이면 찬 공기와 함께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두 뺨이 얼얼하도록 동무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던 옛 기억이 또렷한데 반갑지 않은 불청객 때문에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돼버린 요즘 예전과 다른 거리 풍경이 이젠 낯설지도 않다. 예전 탄광촌 아이들은 시냇물을 검은색으로 칠했다고 했다. 요즘 도시의 아이들은 거리 풍경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까. 뿌연 잿빛이나 누런색 하늘 아래 길거리엔 온통 마스크를 착용한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만 가득하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빼앗겨 버린 기분이다.
올겨울은 첫눈으로는 제법 많이 내렸었다. 이른 아침부터 두어 시간 관리소 담당구역 제설작업을 끝냈다. 젖은 내의와 얼굴, 머리의 땀을 난방기 바람과 수건으로 닦아낸다. 앞으로도 몇 차례 더 눈이 올 텐데 좀 더 효과적인 제설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물다, 문득 염화칼슘 살포기가 생각났다. “그래, 그런 게 있었지. 어쩌면 이웃 단지에선 이미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왜 이제야 생각났지?” 하며 부랴부랴 인터넷 사이트를 뒤졌다. 가장 많이 소개되는 튼실한 기종을 대상으로 가격과 성능을 살폈다.
2개 필지로 나뉘어 있는 단지 구조상 제설작업용으로 두 대가 필요하다. 굵은 바퀴에 하체가 가장 튼튼해 보이는 기종을 점찍어 다른 안건과 함께 대표자 회의에 올렸다. 살포기 구매에 대한 대표자들의 얼굴에 ‘그냥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지’ 하는 마뜩잖은 기색도 보였으나 모른 체하고 제안 설명을 끝냈다. 회장과 대표자들 대부분이 신임이고, 경비원의 수고를 덜 수 있다는 명분으로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리라는 예상대로 통과되었다.
그 후, 장기수선충당금 세대 부담액 인상 관련 가정통신문 작성, 동의 절차 수립 과 회의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그 와중에 귀 기울인 일기예보에는 아직 눈 소식은 없고 대신 요즘 하는 짓마다 밉상인 이웃 나라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 소식만 요란했다. 강설 예보와 동시에 구매하려 했으나, 눈 소식은 없고 미세먼지에 물든 잿빛 하늘과 겨울인지 봄인지 헛갈리는 날씨만 이어졌다. 결국 살포기를 사전 확보하기로 하고 송금과 함께 배송을 요청하여 인수 후 자재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매년 겨울, 눈 예보와 함께 보행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염화칼슘 살포 작업과 미끄럼 주의 표지판 설치를 곳곳에 하고 안내문 게시도 빠진 곳이 없도록 거듭 당부한다. 안내문 게시가 없거나 제설작업이 미치지 못한 곳의 미끄럼 사고는 그 원성과 책임이 오롯이 관리소 몫이 된다. 일손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구석구석 세심한 제설작업을 당부하고 채근하며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눈 오는 날이 재활용 수거일과 겹치는 날이면 단지 안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눈과 전쟁을 함에 수적 열세에다 무기라곤 재래식 소총 같은 대빗자루와 플라스틱 눈삽이 전부인 경비원이 넓디넓은 담당구역을 나름의 사명감으로 온 힘을 다해 눈과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화력과 성능이 뛰어나고 인공지능이 장착된 최신예 병기는 아니나, 염화칼슘 살포기라는 그래도 구식 소총 같은 장비보단 성능이 다소 나은 놈을 지원할 수 있어 부담감은 다소 덜었다.
눈이 왔다 하면 자동차 바퀴가 절반이 빠지거나, 심지어 고립을 초래하는 폭설이 잦은 강원도나 일부 지역 근무자의 고충에는 비할 수 없고, 겨울 가뭄으로 병충해 창궐과 과수 작황을 걱정하는 농심을 생각한다면, 까짓 미세먼지나 황사 푸념 따윈 배부른 투정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칠십 안팎인 나이로 제설작업을 하는 경비원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리란 기대와 함께 눈 소식이 뜸한 이번 겨울이 그래서 고맙다. 하지만, 성능 실험을 마치고 출동 대기 중인 살포기에 염화칼슘을 담아 흩뿌려대는 장면을 보란 듯이 시위하고, 다소나마 줄어든 수고에 좋아하는 경비대원의 모습도 볼 겸 한 번쯤 눈이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