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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속 (다이)아몬드 찾기

크리스마스는 덴마크에서 - 네 번째 이야기

by 새벽별

크리스마스이브 만찬의 마지막은 언제나 디저트 '리살라망(Risalamande)'으로 마무리된다. 덴마크의 전통 푸딩으로, 저녁 만찬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덴마크어와는 사뭇 다른 이름의 디저트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고, '아몬드가 들어간 밥'이라는 뜻이다. 식탁에서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꽃이 피어나고, 접시가 비어갈 즈음이면 나는 냉장고에서 시어머니가 미리 만들어 둔 푸딩을 꺼내온다.


리살라망은 차갑게 식힌 밥알에 크림을 넣고 약간의 설탕과 바닐라 향을 첨가한 뒤, 잘게 부순 아몬드를 섞어 만든다. 단맛과 고소한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푸딩이다. 크림과 아몬드가 많아 다소 느끼한 맛이 나지만, 그 위에 붉은색 체리 소스를 살짝 얹으면 맛이 한결 산뜻해진다. 하얀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룬 그 모습 또한 덴마크의 국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 푸딩에는 꼭 지켜야 할 전통이 있다. 바로 온전한 통아몬드 하나를 완성된 디저트 속에 숨겨 두는 것이다. 푸딩이 담긴 볼이 식탁에 오르면, 곧바로 아몬드 찾기 게임이 시작된다. 모두들 어느 부분을 떠먹을지 고민한다. 마치 다이아몬드 광산을 조심스레 채굴하듯, 긴장감마저 감돈다. 아몬드를 찾을 때까지는 푸딩을 계속 먹어야, 우승자가 될 확률이 높다. 먼저 찾으려 서둘러 먹다 보면 아몬드가 부서질 수 있어,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어야 한다.


<시어머니의 리살라망과 체리소스>

'올해는 누가 아몬드를 찾을까?'


본인이 찾기를 바라면서 모두가 속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가끔은 아몬드를 찾고도 입 안에 머금은 채, 모르는 척하는 '야비한 우승자'도 있다. 가족을 속이기보다는, 그저 게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다. 한 번은 푸딩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도 우승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시어머니는 조사에 나섰다. 먼저 장난기 가득한 시아버지에게 물었다.



"해닝! 찾았는데도 숨기고 있는 거 아니에요?"


모두가 서로를 의심했지만, 끝내 아몬드를 찾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시어머니는 깜빡 잊고 아몬드를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너무 바쁜 주방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였다. 이토록 열정적으로 아몬드를 찾으려는 이유는, 게임의 재미뿐만 아니라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큼직한 선물 때문이기도 하다. 한번은 남편이 우승해 커다란 금빛 포장의 초콜릿 세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성인이지만 아직 '아이들'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의 선물이었다.




<아몬드를 찾고 기뻐하는 아이>

딸아이가 갓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겨울에 덴마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우리 가족과 시부모님만 식사를 하게 되었고, 아몬드 찾기 게임 또한 빠지지 않았다. 처음 참가하는 아이는 숟가락을 쥔 채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아몬드는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다 남편이 먼저 찾은 걸 알게 되었고, 아이만 모른 채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다. 푸딩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던 아이는 실망하며 점점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주방으로 가 몰래 아몬드 하나를 가져왔다. 우리는 아이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고, 시어머니는 재빨리 아이 그릇에 아몬드를 숨겼다.


'앗, 내가 아몬드를 찾은 것 같아요! 아, 신나, 신나!"


딸은 아몬드를 들고 환하게 웃었고, 어른들은 아쉽다는 듯 어색한 연기를 펼쳤다. 시어머니는 준비한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내밀며 "축하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는 큰 상자를 들고 무척 행복해했다. 작은 속임수가 있었지만,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따뜻한 밤이었다.




홍콩에 살던 시절, 남편의 미국인 직장 동료는 덴마크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바닷가 근처의 작은 마을에 살며, 매년 우리 가족을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하곤 했다. 당연히 덴마크 음식을 주로 만들게 되었고, 그해 나는 리살라망을 준비하기로 했다.


시어머니의 레시피대로 따라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밥알과 크림이 부드럽게 섞여야 하는데, 내가 만든 푸딩은 마치 된밥처럼 뻑뻑했다. 결국 밥부터 다시 지어야 했다. 시어머니 손끝에서는 모든 게 부드럽게 흘러갔는데, 직접 해보니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두세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리살라망에 통아몬드를 넣고, 냉장고에 조심스레 보관했다.


파티 당일, 식탁에는 덴마크의 구운 오리 대신 북경식 오리고기와 샐러드가 올랐다. 그리고 동료가 직접 만든 덴마크의 적양배추 피클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맛을 보며 '역시 시어머니의 손맛을 따라갈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 아이들도 아몬드 찾기 게임은 오랜만이었는지 무척 즐기면서 푸딩을 먹었다. 다행히 동료의 어린 아들이 승자가 되었고, 우리가 준비해 간 쿠키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동갑내기였던 그 집 큰딸과 우리 딸은 이해한다는 듯이 어린 동생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크리스마스 식탁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작은 놀이에는,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만드는 덴마크 사람들의 재치와 온기가 깃들어 있다. 그 속에서, 함께 나누는 웃음과 먹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마치 아몬드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처럼, 그 순간은 더욱 빛나고 소중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심한 배려와 인내, 사랑,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을 훈훈하게 덮어주는 행복이 녹아 있다.


점점 작아지는 시댁의 크리스마스 저녁 식탁이, 내년엔 다시 큰 웃음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며 조용히 속삭여 본다.


'올해는 누가 아몬드를 찾을까?'



<리살라망 커버 사진 출처> Risalamande - The Classic Danish Christmas Dessert - Danish Reci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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