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시골 살기 17
풍성했던 감나무가 그 잎을 하나 둘 놓아버리던 지난 11월 말, 육지에는 큰 눈이 내렸다. 첫눈치고는 너무 많은 양이라 사건 사고도 잇따랐다. 11월에 이렇게 대설이 온 것이 117년 만이라고 하니 놀라울 만한 일이다. 전에 살던 수도권 지역에도 30~40센티미터 눈이 와서 임시 휴교령까지 내려졌다니, 상상할 수 없는 어머어마한 양이었나 보다.
직업 특성상 눈이 오면 더 바빠지는 친구는 비상이 걸렸다며, 제주에도 눈이 많이 오지 않냐며 걱정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사실, 문자는 내가 보냈어야 했다. 그때 내가 사는 서귀포시 남서쪽 해안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내리다 말다 하던 날이었다. 눈은커녕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기도 했다. 온 나라가 한 세기 만에 내린 폭설로 난리여서, 미국에 사시는 고모님도 걱정이 되셔서 전화를 주셨다.
제주도에도 눈은 내렸다. 한라산과 중산간 지역에 폭설이 내려 일부 도로가 통제되었고, 강풍으로 하늘길과 바닷길도 차단되었다. 그런데 같은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도 서귀포 남서쪽에는 첫눈이 내리지 않고 있다. 안전상 감사해야 할 일인데도, 겨울 하면 역시 눈이 떠오르니 조금 그립고 섭섭한 마음이 든다.
이곳은 12월 초까지 난방을 틀지 않을 정도로 그리 춥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영상 기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점점 쌀쌀해져 난방을 틀게 되었다. 제주에서 도시가스는 시내 위주의 거의 대단지 아파트에만 설치되어 있고, 읍면 단위는 대부분 LPG나 기름보일러를 사용한다. 어렸을 적에 기름보일러를 쓴 적이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기름값 걱정을 많이 하셔서 온수를 아껴 써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기름보일러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있어, 집을 매수할 때 그런 집은 배제했다. 하지만, 이 집이 기름보일러임에도 무척 마음에 들어 결국 사게 되었다. 기름보일러에 사용하는 등유는 인근 주유소에 전화로 주문하면, 당일이나 다음날에 배달 트럭이 온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은 기름에 물이 들어갈 염려가 있어 배달을 하지 않으니, 미리미리 주문해야 한다.
주문하면, 보통 한 드럼(200리터)을 넣는데, 겨울이라 자주 쓸 것을 예상해 두 드럼을 넣으니, 역시 기름값이 비싸다. 하지만 지난 7월 초에 한 드럼을 넣고 온수로만 사용하다 12월 초에 다시 주문했으니, 가성비가 그리 나쁘지 않은 셈이다. 기름통을 다 채우니 배부른 것처럼 마음도 넉넉해진다. 또 난방이 잘 되어 집이 따뜻하니 미음도 훈훈해진다.
추운 날씨에도 밖에 나가길 좋아하는 고양이들한테도 월동준비를 해줘야 했다. 그래서 조끼 한 벌씩을 선물해 주었다. 할머니들이 김장 담그실 때 입으신다는 조끼 스타일이다.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주문했는데, 알록달록하니 화사하고 보온성도 뛰어나 보였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안 입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억지로 입혀 놓으니, 내 마음은 안심이 되는데, 고양이들은 어색한지 걷는 것도 엉거주춤하고 불편해 보였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내가 졌다. 추워도 나가겠다고 떼쓰는 첫째 녀석은 뛰어놀다가 마당 구석에서 털을 세우고 웅크리고 있다. 나름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위를 피하는 것 같다. 너무 춥다 싶으면 잠시 들어왔다 나간다. 둘째 녀석은 나만 따라다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들의 털이 전보다 더 풍성해진 것 같다. 내가 걱정 안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본능적으로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손짓하기 전에, 나도 마음의 월동준비를 해야 한다. 일찍 해가 지는 추운 겨울이 되면, 시골에서는 바깥 활동이 줄어들고 집 안의 아늑함에 더 기대게 된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과 따뜻한 차 한 잔을 곁들여 겨울을 나려 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감이 더욱 소중해지는 법이라, 마침 '당근'에서 동네 북클럽이 열린다고 하여 참여하기로 했다.
조만간, 우리 동네에 첫눈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렇게 시골에서의 첫 월동준비를 마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