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한 생명체가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는 것을 매우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고 느끼게 된다. 강아지는 6세 이후부터 노령견으로 분류를 한다는데 지금 아홉 살인 우리 강아지는 나무랄데없이 발랄하고 건강하게 보인다. 그래도 의학적으로 노령견이라 하니 정기검진과 규칙적인 운동, 섭식에 가장 영향을 주는 스케일링 정도는 매우 신경을 쓴다. 반려견 천만 시대라고 하니 비단 우리 집 이야기 만은 아닐 것으로 올림픽 공원에서 만나는 반려견 중에는 스무 살을 넘기고도 자신의 네 다리로 종종거리며 산책을 하는 아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강아지 평균 수명을 열두 살로 알고 있었는데 스무 살이라니....., 건강은 타고나는 것이라 하지만 관리하는 만큼 결과치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령견이 치매, 골절과 실명, 심장 질환등 각종 노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고, 눈물 자국이 까맣게 얼룩진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악취까지 풍기며 골골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호자들은 말한다. '말도 못 하는 짐승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차라리 안락사를 시키는 게 저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아닐까요?'라는 말을 소곤거리며 주고받는다.
출처: 연합뉴스(늙고 병들어 버려진 강아지)
퇴직을 하고 나니 요즘 들어 '어떻게 노년을 보내고, 어떻게 죽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발단은 친정엄마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 일하고 살림하며 애들 키우느라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계획하며 10년 간의 버킷리스트까지 만들어 보면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친정 엄마가 자꾸 섭섭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버지가 컨디션이 안 좋은데 왔다 가면 안 되겠냐. 밥맛이 없다는데 입맛 돋는 음식 좀 구해봐라. 집에 놀면서 아버지한테 신경 좀 써라'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요청을 하고 신경 쓰이게 한다. 시어머님도 전화를 드릴 때마다 어디가 안좋다. 무슨 병원을 다녀왔다. 늘 아픈 이야기 뿐인데 듣고 성격상 흘리지도 못하고......, 항상 마음이 바늘방석이다. 친정이나 시댁이나 혼자 직장 다니고 살림하며종종거릴 때는 멀리 있다는 이유로 애 한번을 안봐줬으면서....혼잣말을 하며 애써 마음을 추스려본다.
"아니, 엄마! 내가 한 달을 놀았어. 두 달을 놀았어. 이제 겨우 두 주 지났어요. 나도 맘편히 좀 쉬면 안돼요?"
아직 온전한 자유함을 맛도 보지 못한 상황에서 자꾸 브레이크를 거니 나도 모르게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을 만나 보니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도 온전치 않아 더 아프면 늙어서 자식한테 짐이 될까 봐 조심조심 살고 있는데, 시댁 어른들이 매일 아프다며 온통 며느리인 자신한테 의지를 하니 내 몸까지는 돌볼 여유가 없다고 한다. 요양 보호사나 요양원 같은 사회 제도가 있다고 하나 조건을 맞추기가 무척 까다로운 데다 그나마도 조건이 맞으면 어른들이 거부하여 그조차 쉽지는 않다고 한다. 그런 중에 2년 동안이나 퇴직한 사실을 숨기고 사는 친구도 있었다. 부모한테 거짓말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알고 서운해하는 것보다 모르고 포기하는 것이 서로 간에 더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그 말도 이해가 간다.
앞서 퇴직한 선배들은 '두 다리 힘 있을 때 많이 다녀라. 그 맘 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하며 조언을 하지만 맘 편히 놀 수만은 없는 현실이 우리 또래들의 처지인 것 같다. 하여간 이래 저래 중간에 껴서 힘든 세대가 5060이 아닌가 싶다.
출처: 게티이미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소풍>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노인들의 우정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는 일상을 다루고 있는데 자식과의 관계, 병들고 고립되어 가는 삶, 죽음에 대한 각자의 생각......, 이런 내용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주인공들은 결국 자식에게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소풍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고민 많은 삶을 끝내고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것을 '소풍'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소풍을 가듯 죽을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일 것일 테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조사로,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스페인에 살고 있는 117세의 미국 여성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28년째 요양병원에 있다고 한다. 28년, 상관 없는 내가 들어도 너무나 긴 세월이라는 생각이 든다. 28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케어를 받으며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면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닐까?
요즘 친구나 동료들의 부모님의 연세를 물으면 90세를 넘긴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90살은 기본이란 생각을 하니 올해로 84세인 친정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밥도 먹기 싫고 움직이기도 싫고.....이러다 곧 죽지 싶다'.는 말씀을 하셔도 두려움이 몰려오지는 않는다. 대부분 요양병원 입원부터 삶의 마지막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다보니 밥투정 하는 여력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삶의 여정이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로 여겨지는 것이다. 겁 많은 우리 엄마는 옛날부터 죽을 복 있는게 최고의 복이라며 자다가 그냥 가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대화하다 보면 자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날까봐 그것도 걱정인 것 같아 보인다.
정말 어떻게 죽는게 잘 죽는 것일까?
영화 '소풍'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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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는 선배의 엄마가 마침내 돌아가셨다. ‘마침내’라는’라는 수식어가 너무나 불경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간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냥 안된 일이라고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머니는 치매로 15년을 요양원에 계셨는데 설상가상 고관절 골절로 거동도 못한 채 누워서만 3년을 보내며 자식도 못 알아보고 용변도 누워서 해결하면서 정말 최악의 상태로 숨만 쉬고 살아 계셨다. 99세의 나이로 천국에 가신 것인데 작년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나오기 시작한다고 하여 놀랐던 기억이 있다.
지난 1년 동안 임종실을 네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는데, 작년 봄에 담당 주치의가 어머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며 자식들을 호출해서 온 가족들이 황망해하며 달려갔는데 이틀 만에 신체 기능이 정상으로 회복되어 일반 병실로 다시 돌아갔다.
이 바람에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아이들이 마련해 준 하와이 여행을 취소하게 되었고, 선배네는 위약금으로 수백만 원을 날려 버렸다. 그 후로 두 번 더 이런 일이 반복되었고, 32년의 공직에서 퇴직한 후 한창 여행 다니며 즐거울 시기에 발이 묶여 버린 선배는 ’ 우리 엄마는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아서 떠나지를 못하고 저토록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근데 여러 차례의 실수로 민망했던 의사가 이번에는 완전한 확신이 있을 때 알리겠다고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시는 바람에 정작 돌아가실 때에는 자식들 누구도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옆에서 지켜보니 남일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저렇게 자신의 생각과 의지라고는 하나도 없이 남의 손에 맡겨진 채 산다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달 전 텔레비전에서 본 ‘나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라는 방송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낯설기만 한 '조력 사망'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예전 싱글로 사는 선배가 자신은 2억은 꼭 남겨두고 살 것이라고 하며, 그 이유를 자신은 돌봐줄 자식도 없는데 나중에 늙고 병들게 되면 스위스로 가서 안락사 하는데 쓸 비용이라고 계획을 말해준 적이 있어 방송 내용에 대해 더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첫 번 째로 등장한 사람은 60대의 남자로 자격증을 10개나 딸 만큼 활동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피부 치료를 위해 맞은 주사에서 바이러스 감염이 되었고, 정체 불명의 그 바이러스는 그 사람의 모든 삶을 망쳐 놓았다. 바이러스가 척수로 옮겨지면서 하반신 마비가 되었고, 더 힘든 것은 끔찍한 환상통으로 인해 마약성 진통제로도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상을 딸의 도움으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너무 처참하고 고통스러운데, 딸에 대한 죄책감까지 커지면서 스위스에 있는 사망조력 단체의 도움을 받아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하소연 하였다. 사망 계획을 실행하려면 우선 스위스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하반신이 마비된 몸으로 혼자 이동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여 딸의 도움을 받아서 가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살방조죄'라는 법이 엄격하여 자신을 스위스로 데리고 나가는 즉시 딸이 범죄가가 되는 상황이라 실행에 옮길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출연자는 인터뷰에서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죽을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데 얼마나 절실하게 죽음을 원하는지가 느껴졌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기본권을 가장 보호 받아야 하는 권리인 줄을 누구나 알지만, 역으로 보면 이런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본질적 기본권이 침해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존엄한 죽음: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하는데,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존엄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무겁고 난해한 말로 다가왔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 생각났다.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근육이 소실되면 근육을 채우는 약을 먹고, 젊은 피를 수혈하고 뇌를 이식하여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 결과는 죽는 것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건 괜찮지 않냐고 물으니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노노, 너무 오래 사는 거? 그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야. 재앙!'
그래서 자신들은 적당한 선에서 죽고 싶으니, 절대 연명 치료를 하지 말도록 서약서까지 작성했다고 한다. 그건 전적으로 공감인데 적당한 선이란게 어떤 것인지가 너무 막연하고 어려운 것이다. 하여간 자연적으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떠나고 싶다. 세대 간의 괴리가 너무 심각해 지지 않는 선에서 내 삶이 따뜻하게 마무리 되었으면 한다.
너무 오래살아 내 존재 자체가 후손들에게 미안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