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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l Jan 19. 2024

스위스에 회사를 차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주 10년, 작은 두려움을 큰 두려움으로 대신하다.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다 우리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였고,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이 지역 사회에 하루빨리 편입되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다. 스위스인의 폐쇄성에 넌더리가 났던 그즈음의 나는 이 동네 인간들마저 나를 이유 없이 흘겨본다면, 난 더 이상 이 스위스에서 타인의 호감을 구걸하는데 내 시간과 열정을 소비하지 않겠노라 남편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터였다. 이사 후, 남편은 집 주변 반경 10미터 내의 모든 이웃에게 떡... 아니지... 편지를 돌렸다. 우리 가족의 사진을 대문짝 만하게 싣고 간단한 우리의 소개 글을 적은 작은 전단지였다.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 물어봤지만 남편은 그냥 이라고만 대답했다. 으름장만 놓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게 뻔한 외국인 아내를 대신해 남편이 낸 아이디어였던 것 같기도 하다. 편지를 이웃들의 우편함에 넣어 놓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한 달 간격으로 한 두 명씩 편지를 잘 받았다며 길에서 말을 걸어왔다. 1년이 지날 즈음까지도 그때 그 편지를 잘 받아 보았다면서 다니는 길에 당신과 당신 딸을 여러 번 보았다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스위스인들이 타인을 받아들이는 속도였다.


길에서 자주 뵈었던 정육점 사모님은 나를 보고 지낸 지 3년 만에야 나에게 내 출신에 대해 물었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우회해서 내가 내 딸과 어떤 언어로 이야기하는지를 먼저 물은 후, 그럼 혹시 내가 그곳에서 나고 자란 건지 물어왔다. 이렇게 우회해 묻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경험해 봐서 이제는 이런 방식의 질문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


하여튼 아직까지는 이 동네에서 나를 흘겨보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이 동네를 벗어나면 여전히 도처에 그 가자미 눈들이 있지만... 이런저런 장소에서 가자미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는 이들도, 편지가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 쑥스러워 우리를 지켜만 보다 1년 만에 용기 내 나를 불러 세우는 이들도 다 같은 스위스인 들이다. 이제 나는 스위스인들이 어떤 지에 대한 질문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라는 하나마나한 어정쩡한 대답을 하고 있다.


그렇게 주변에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무렵 누군가 내게 책 편집을 의뢰해 왔다. 지역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남편이 그 모임에서 와이프가 그래픽디자인을 한다고 했고, 마침 동네 크리스마스 축제에 쓰일 동화책이 글과 그림만 완성된 채 레이아웃 디자인을 기다리 중이었다. 난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어도비 그래픽 프로그램 하나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그런 대충대충의 학생이었다. 내 경력의 대부분은 마케터였고 다행히 인하우스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을 해서 그래픽에 관련해서는 지시와 평가만이 내 업무였다. 가끔 지인들이 부탁하는 자잘한 문서나 동네 찻집에서 필요로 하는 초대장들을 더듬더듬 디자인하며 자족하던 그런 내가 책을 만들겠다고 덥석 워드파일을 받아버렸다. 그렇게 평일 출근길 2호선 신도림역에서 사람들에 떠밀려 내려야 할 역도 아닌 곳에서 하차를 해 버리 듯 일이 시작되었고, 살 아이를 건사하며 파도처럼 밀려드는 세 를 헤쳐 나가기도 벅찼던 내가 그래픽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살 아이가 유치원을 가기 시작할 무렵 난 정기적으로 생기기 시작하는 내 시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시간이 생긴다는 의미가 내게는 그 시간을 활용해 생산적인 즉, 재화를 벌어들이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쨌든 사람을 만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사람들과 같. 이. 일을 해야 하는 바로 그 지점을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나의 자존감은 나의 발목 어디쯤에 묶여 질질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겁 많은 뒷집 누렁이처럼 엉덩이만 컴컴한 개 집에 넣고 바람에 굴러다니는 낙엽에게 까지 짖어댈 태세다. 이렇게 길에 굴러다니는 낙엽에 레이저를 발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느니 차라리 회사를 차리자 싶었다. 정기적으로 생긴 자유시간에 반짝반짝 집도 쓸고 닦고, 열심히 밑반찬도 냉장고에 채워 넣으며 혼자 있어도 될 일인데, 난 떡하니 회사를 차려 놓고 앞으로 부딪쳐야 할 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두려움의 원인은 저 가자미들이 아니라, 가자미들 앞에서 나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스스로 당당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내 일이 필요했다.(주부도 당당한 직업이라고 말하지 말자. 주부에게는 신용카드 발급도 안된다.) 회사를 차려놓고 보니 가자미들에 대한 두려움보다 날아오는 보험과 세금 청구서들이 더 두려워졌다.


다행히 나의 욕심은 일 년에 한 번 한국에 다녀올 비행기 값 만이라도 벌어보자였다. 동네에서 매년 한 달간 열리는 크리스마스 행사의 모든 인쇄물 디자인이 우여곡절 끝에 내게 넘어왔다. (20년 넘게 이 일을 맡아해 오신 85세의 인쇄소 사장님께서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셨기에...) 인쇄물은 프로그램, 브로셔, 동화책, 초대장, 플래카드, 지면광고 등등 대충 15종 정도로 비행기 값은 어찌어찌 벌게 되었다. 처음에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읽히는지도 모른 채 벌벌 떨며 시작했던 그 40페이지 조금 넘는 동화책은 동네에서 매년 열리는 이 행사 매얼리슈타트(Märlistadt)에서 판매되는 동화책이었다. (https://www.maerlistadt.ch/)


Märlistadt 행사에 가장 중요한 저 대형 트리는 마을의 자랑이다. 트리 설치를 시작으로 광장은 반짝반짝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알린다. (출처: maerlistadt.ch)


광장에서 이뤄지는 Treichler의 공연. 대형 워낭을 맨 이들을 Treichler라고 하며 큰 종소리를 내며 대형을 이뤄 행진을 한다. (출처: maerlistadt.ch)


행사 중 진행되는 야간 경비원 투어. 동네를 돌며 동네의 역사와 각 건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우리 집도 투어 코스에 포함된다. 가끔씩 창문을 살짝 열고 야간 경비원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다. 경비원들 마다 들려주는 이야기가 상이하다.어떤 이야기가 이 건물의 역사적 진실인가?



겨울이면 급감하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우리 동네는 12월 한 달간 매얼리슈타트(Märlistadt) 축제를 연다. 매년 동화를 하나 선정해 화가를 섭외하고 20점의 그림을 의뢰한다. 그 그림은 상점의 쇼윈도에 이야기와 함께 전시되고 행사기간 동안 아이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분한 가이드와 함께 그림이 걸린 동네를 돌며 그 해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외에도 매일 이어지는 콘서트와 연극 등 크고 작은 무료행사가 매일 이어진다. 행사의 주체는 동네의 상인 연합회이며, 대부분의 행사가 무료로 제공되는 데에는 동네의 '야콥과 엠마 윈들러 재단 (Jakob und Emma Windler Stiftung)'의 경제적 도움과 동네 주민들의 자원봉사 덕이 크다.


슈타인암라인은 관광지이지만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는 주민은 별로 많지 않다. 야외활동의 비중이 무척 많은 스위스에서는 겨울이 되면 그 남아도는 시간들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치즈를 아주 천천히 녹여 세월아 네월아 그 녹인 치즈에 빵을 찍어 두 시간씩 먹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많아지는 겨울 한 달, 주민들은 다시 북적북적해진 광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봉사활동으로 여가시간을 보낸다.


2003년 올해 이야기의 주인공 Juna로 분장한 가이드와의 이야기 투어.



여기서 잠깐 이 '야콥과 엠마 윈들러 재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재단은 1988년 1월 10일에 사망한 엠마 윈들러의 공개 유언에 의해 1989년 스위스 슈타인암라인(Stein am Rhein)에 설립되었다. 야콥과 엠마 남매는 사망하며 모든 재산을 슈타인암라인의 문화 활동에 지원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들이 기부한 재산에는 스위스 제약회사 Sandoz의 주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의 사망 후 엄청난 주가 상승으로 이 재단은 제법 영향력 있어졌다. 돈이 돈을 버는 반열에 올라선 재단의 탄탄한 재정은 동네의 여러 문화 사업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내가 디자인을 하고 받는 돈도 이 재단으로부터 흘러 흘러 내게 오고 있으니 '고 엠마 윈들러 양'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재단 역사의 시작은 이러하다. 슈타인암라인의 가문 중 하나인 린드부엄(Lindwurm)에서 태어난 로버트그네(1852-1926)는 취리히의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 ETH에서 화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876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좋았겠다. 로버트 그네는 학술화학과 화학산업을 통합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스위스 화학공업학회(1882-1896)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로버트 그네의 사망 후 그의 딸 마리 그네(1883-1944)가 그의 전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녀는 의학을 전공했지만 의사가 되는 대신 병든 어머니를 돌보며 집안 살림을 맡았다.  오빠 월터는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으며 마리 자신도 62세가 되던 해 산악사고로 사망했다. 그녀는 산도스 주식이 포함된 1150만 프랑의 재산을 여러 상속인에게 나눠주었으며 그녀의 사촌이었던 야콥 빈들러와 엠마 빈들러도 그 상속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저택과 포도밭을 포함해 산도스 주식의 12분의 1(105주)을 각각 상속받았다. 그들은 회사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며 지분을 꾸준히 증가시켰고 1975년 야콥 빈들러가 사망 당시 그는 3034주의 산도스 주를 남겼는데 당시 주가로 485만 스위스 프랑이었고, 엠마의 보유주식은 5810주로 증가했다. 주식의 가치는 그들의 사망 이후 크게 상승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자료 출처: windler-stiftung.ch)


그들이 상속받았던 1500제곱미터에 달하는 린드부엄(Lindwurm) 저택은 1279년도에 지어졌으며, 현재는 린드부엄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린드(Lind)는 온순한이란 뜻이고 부엄(Wurm)은 애벌레를 뜻하니 이 린드부엄 가문의 뜻은 '온순한 애벌레'인가 추측해 보았으나 '린드부엄'은 용의 고대어라고 한다. 가문의 이름이 용이라니 한때 대단했던 가문이었나 보다. 뭐 아직까지 저 정도의 재력이니 여전히 대단하긴 하다. 700년도 더 된 고택은 1850년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흥미로운 데다가 동네 주민은 무료입장이 가능해서 가끔 한 바퀴 돌고 온다. 혹시라도 다녀가실 분들이 계신다면 겨울철에는 휴관이니 홈페이지를 참조하고 방문하셔야겠다. (museum-lindwurm.ch)




나의 이 어쩌다 보니 생긴 디자인 회사는 아직 홈페이지 하나 없고, 당당히 수익이랄 것도 없이 고향땅 밟을 비행기 값(이코노미좌석. 다시 한번, 이코노미 좌석!)이나 벌어주고 있지만 나라는 투명인간에 색을 입힌다는 심정으로 일해가고 있다. 나고 자란 한국에서 나는 타의에 의해 여러 색이 입혀지고 스스로에 의해 또 여러 색이 덧칠해졌었다. 그러다 아주 먼 나라로 떠나 와 살다 보니 이들에게 난 그냥 노란색 아시안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특징지어버린 이 노란색을 거부하고 난 이곳에서 나에게 다시 한번 나의 색을 입혀야 했다. 어떠한 색이 입혀질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 의해 특징지어질 스스로에 대한 기대 만으로도 이 누렁이는 개집에서 엉덩이를 빼고 나올 수 있지 않을까?


P.s. 뭔가 스위스에서 회사를 차릴 때의 프로세스나 준비 서류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이 글을 읽어 내려간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죄송한 글이지만 그 구체적인 회사설립에 대한 내용은 다음으로 그 기회를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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