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입을 대하는 스위스와 한국의 상반된 태도.
지난번 스위스 사람들이 그들의 끼니를 대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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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가 이 정도이니 간식을 대하는 이들의 문화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개인적이지만 난 이곳에 또 그 이야기를 풀어 본다. 한국과 스위스 두 문화의 접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내게는 일상에서 두 문화가 상반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식탁 먼 곳에 있는 소스가 필요할 경우 서양에서는 그 소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누구든 그에게 소스를 건네줄 것을 부탁한다. 다른 이들의 접시 위로 팔을 뻗어 멀리 있는 무언가를 집어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한국은 반대로 연장자에게 무엇을 건네달라 부탁하느니 발딱 일어나 네가 직접 가져오라 가르친다. "부장님 그 앞에 물 좀 주세요."라고 하는 말단 직원이 있다면 그 직원은 어디 가서 예쁨 받기 힘든 게 한국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는 아이에게 나는 유교문화에 기반한 한국의 장유유서 등을 6세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충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설명해 준다.
"한국은 스위스랑은 다르게 한 마을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아주 오랫동안 살았어.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산다는 건 그곳에서 이미 오랫동안 살았던 할아버지들이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아주 중요했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공경하는 게 아주 중요했던 거야..."
아이는 나의 말을 조금 들어주더니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고 스위스에서는 이렇게 하겠다며 마침표를 찍고 호로록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공경'이란 단어가 어려웠던 걸까? 다음엔 더 쉽게 해야 하는 걸까?
스위스 문화야 이곳에서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니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지만, 이곳의 관점에서는 이질적인 한국의 문화를 아이가 마주할 때 나는 내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아이를 이해를 도와주려 한다.(아이가 나의 설명을 들어준다면 말이다.) 두 문화를 모두 경험해 본 부모가 나름의 해석으로 오늘 아이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앞으로 아이가 마주하게 될 다른 두 세상이 덜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신체의 에너지원이라는 그 기본적 기능 위에 여러 가지 문화적 의미가 덧대어져 있는 '음식' 또한 그중 하나이다. 음식의 문화적 의미 중 상당 부분이 한국에서는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콩한쪽도 나눠먹고, 음식 끝에 정이 나는 한국인들 아닌가. 오죽하면 헤어질 때 인사가 '언제 밥 한 번 먹자!'이지 않은가.
남편과 함께 넷플릭스로 '응답하라 1988'을 볼 때였다. 이 드라마를 즐겨보는 88년생 스위스인 남편이 신기했던 나는 응팔이 왜 재미있는가에 대해 남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응팔에서 보이는 이웃들의 스스럼없는 관계가 보기 좋다고 했다. 이런 남편에게도 응팔에서 표면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덕선과 그 친구들이 엄마들의 심부름으로 저녁 찬거리를 이 집 저 집으로 배달하는 장면이었다. 남편은 바쁘게 이 집 저 집 들락날락 거리는 아이들을 비추는 그 쌍봉동 골목 씬을, 그냥 우연히 모두 찬거리가 많았던 어느 하루의 코믹한 에피소드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 시절 우리의 식탁에는 다른 집 반찬이 항상 한 두 가지씩은 있었고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여전히 그렇게 이웃이나 친척들과 이런저런 음식을 나누고 사신다. 프로그램에서의 그 장면은 이웃 간의 관계라는 형이상의 영역을 음식이라는 형이하의 대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서로 간에 나누는 음식들이 건너가고 건너오는 궤적으로 대체해도 될 만큼 한국인들은 주변 사람들과 음식을 빈번히 나눈다.
이 문화의 바탕에는 오늘 내가 먹고 싶어서 한 이 음식이 당연히 네 입에도 맛있을 것이라는 단일 민족으로 오래 살아온 이들의 동질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니 입만 입이냐라는 상대의 대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 핀잔의 말을 그대로 직역해 이곳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러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쩌면 내 입은 내 입인데 네 입은 네 입인지 아닌지 내 알바 아니오라고 답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누군가가 생각나는 일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며 그 누군가가 생각나 목구멍으로 그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일이란 이들에게는 더더욱 이해가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내 입만 입이 아닌 한국에서 나는 겨울철이면 가끔씩 출근길 리어카에서 파는 귤을 한 봉지씩 사갔다. 그렇게 귤 한 봉지를 사들고 출근하는 사람이 두서넛이 되는 그런 날은 사무실이 종일 향긋한 귤향으로 가득하곤 했다. 이른 아침 업무지구 지하철역 입구에는 예닐곱 명이 먹을만한 양의 귤을 봉지에 담아 놓고 파는 리어카들이 적지 않았으니 그렇게 귤 한 봉지를 사들고 출근하는 직원들이 비단 우리 사무실 직원들 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고 배우고 자란 내 눈에 비친 이곳의 모습은 이러했다.
동네 강가에서 한 여름 아이들이 모여 놀 때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 한 명과 우리 아이 하나만 강가에 남았다. 가만히 앉아있던 그 친구 엄마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근처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를 사 왔다. 아이스크림 하나! 당연히 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내 딸아이는 물끄러미 그 아이의 아이스크림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두 아이를 그 엄마는 별생각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난 그런 셋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내 속으로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너도 참 눈치 없다. 니 딸이 먹고 있으면 같이 놀던 내 딸도 먹고 싶을 텐데 어떻게 그걸 하나만 덜렁 사들고 나오냐? 가게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이 하나만 있지도 않았을 텐데 너도 참. 그렇게 지금 꼭 네 딸만 아이스크림을 먹여야 하면 차라리 집에 가서 먹이던가... (마침 그 아이는 강가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맛있게 먹고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과자를 나눠 먹는 거라고 배운 내 딸에게 난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니? 과자는 나눠먹고 아이스크림은 혼자 먹으라고 할까?'
당연히 아이는 집에 와서 내게 이 억울한 상황에 대해 물었다.
"A가 아이스크림 오늘 혼자 다 먹었어."
"너도 먹고 싶었어?"
"그럼, 나도 그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
"아줌마가 집에 하나밖에 없어서 하나만 갖고 오셨겠지." (아이는 그 엄마가 가게에 다녀온 것을 모른다.)
"엄마는 집에 하나밖에 없으면 친구들이 먹고 싶어 하니까 차라리 집에서 혼자 먹으라며."
"어... 엄마는 그게 더 좋을 것 같거든. 너 오늘 먹고 싶었는데 못 먹어서 지금 기분 안 좋잖아."
"그럼 A가 오늘 잘못한 거야?"
"아니... 잘못한 건 아니고... 그냥 다 생각이 다르니까. 그래도 괜찮다는 엄마도 있고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엄마도 있어. 엄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너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거야. 네가 크면 그럴지 그러지 않을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거지......."
난 혼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아이를 피해 얼른 주방으로 도망갔다. 아이는 이제 6살,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나는 나의 저 '그냥 다 생각이 다르다.'에 살을 붙여주고 싶다. 지금 네가 자라고 있는 이 부족 기반의 사회에서는 혼자 홀랑 뭘 먹어도 상관없지만 오랜 시간 씨족 기반의 문화로 살아왔던 한민족이랑은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 엄마를 눈치 없고 이기적인 인간이라 치부하고 눈 한번 흘기면 나 살기에 더 편하겠지만 사실 그 엄마는 되레 예의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조심하는 쪽의 사람에 가깝다. 예의 바르고 남을 잘 배려해 나도 편하게 여기는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도 덧붙여본다.
친구 K의 가족들과 함께 하루는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같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하던 중 K의 아빠가 일어나더니 자기 식구들 몫의 머핀 3개를 사 왔다.('달랑 머핀 3개'라 쓰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내 딸아이는 물끄러미 그 친구의 머핀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이번에는 일어나 침을 흘리고 있는 내 딸아이 몫의 머핀을 따로 사 왔다. 그런데 레스토랑 카운터로 머핀을 사러 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머핀을 사들고 가면 혹시라도 그 부모가 우리 아이를 배려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너무 민망해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콩 한쪽도 나눠먹는 나라의 인간들이 할 법한 걱정 말이다. 와우! 그 부모들은 내 아이의 머핀을 보더니 그 머핀도 맛있게 생겼다며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아주 산뜻하게 건네왔다.
여기는 그런 나라인 것이다. 난 날 앞에 두고 누군가 혼자 맛있게 뭘 먹는 상황에 당황하지 말아야 하지만 나의 이 다짐이 무색하게 난 매번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 (어디 이것 뿐이랴? 놀이터에서 모유수유를 하며 돌아다니는 엄마들이나 서로 갑자기 키스를 하는 레즈비언 엄마들을 마주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래, 이곳은 유럽이다. 난 여전히 타인을 앞에 두고 민망스러워 혼자서는 뭘 먹지 못해 매번 타인의 입을 챙긴다. 세상 어디나 인간은 제각각인지라 타인의 입까지 챙기는 스위스인도 당연히 있다. 내 남편이 그러하다. 자기 마실 맥주를 사러가며 자기 식구들 몫의 머핀 3개 만을 사 온 그 아빠에게 혹시 맥주를 더 마실건지 의향을 물어보는 내 남편 같은 사람도 있다. 개인주의의 요람 유럽에서 나고 자란 이 청년이 이역만리에 한민족 출신 여성에게 끌렸던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