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요.
26. Aug
나는 이미 가을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다. 봄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요 근래 비가 몰아치며 날이 시원해진다고 느끼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가을은 멀었고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기분이 우울해지니 가을이 찾아 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개학을 했음에도 새벽에 옥상에 올라가 헤드랜턴을 차고 어린왕자를 읽고있다. 어린왕자, 내 인생 베스트 셀러로써 가을이 찾아오면 항상 목도리가 휘날리는 그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비단 가을 뿐 만이 아니라 봄에도 나는 어린왕자를 읽는다. 봄에는 어린왕자를 차마 눈물 없이 떠나 보내지 못해 그를 내쫓 듯 떠나 보내는 예쁜 장미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잡담은 이만하고, 다시 가을 이야기를 해보자.
이제 거의 다 찾아 온 가을이 문을 들어오면, 그 때의 나는 독서를 할 것이다. 전 학기에 독서를 많이 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는데 가을이 점점 다가오며 도서관을 향하고 있는 나의 발과,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나의 손과, 글자들의 무도를 주워 담고 있는 나의 눈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가을을 맞아 읽기 시작한 책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왕자이다. 어린왕자의 줄거리와 내용을 외울 말큼 많이도 읽었음이도 내가 항상 어린왕자를 찾는다. 어린왕자를 읽을 때면 잊어버린 삶의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금 깨닳게 된다. 우리가 드라마를 볼 때 주인공들의 연애를 구경하며 좋아하 듯이 어린왕자와 장미의 사랑을 보며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린왕자가 그의 여정 속에 만나는 다 크지 못한 어른들을 보며 좋은, 참 어른이 대해 생각한다. 이제는 이런 어린왕자와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과 현실의 사람들과의 것 보다 더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같다.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 주신 생택쥐페리 선생님께 감사한다.
가을이 오고 있으니 역시 감성이 풍부 해지나 보다. 평소에 안 하던 생각과 행동을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색에 잠기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일들은 대게 충분히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여름 방학을 한 달 쯤 뒤로 미뤄 가을 방학을 실시하기를 바란다. 가을만 되면 나의 감정이 요동치기 때문에 가을은 네 절기 중 가장 기다려지는 절기이기도 하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기온이 실짝이라도 떨어지기 시작한다면 그 기쁨은 감출 수가 없다. 그렇게 며칠 들 뜬 상태로 지내겠지만, 그 후로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해 옷장 정리를 하고 긴 옷을 꺼내 입기 시작하면 걱정과 약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3계절을 기다리며 맞이한 가을이 벌써 달아 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과 공포 말이다. 나는 가을이 내 곁에 더 머물기를 바라지만 가을을 내쫓기 위해 시베리아에서 바람을 불어대는 겨울을 담 넘어로 훔쳐보고 있자면, 그런 겨울이 참 밉다. 물론 우리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 겨울이 부리는 욕심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결국 자신의 가슴을 뚫고 지나갈 부메랑을 던지는 동물들의 이기심도 한 몫 할 것이다.
참, 내가 알고 있는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인체의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는데 이 주기가 가장 긴 세포는 7년의 주기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말인 즉슨 우리 신체는 7년 전의 신체와 아예 다른 신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7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7년 전의 기억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에 근거해 나는 인간이 어른이 되고 후에 늙어도 몸보다는 기억이 더 오래 몸에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저장되는 기억 또한 많아질 것이다.
내가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나에게도 기억은 점점 쌓여가고 있다. 이젠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것보다 과거의 기억을 더 많이 자주 느낄 만큼 저장된 기억이 많아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 여름 쯤 부터는 내가 마주하는 계절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음에도 다음 계절, 또는 그 다음 계절을 그리는 것 같다. 이 때문에 파생되는 가을의 걱정 거리가 하나 있는데, 가을이 와도 가을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지 못하고 봄의 설렘을 고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간 기다려온 가을이란 말인가. 지난 봄의 기억 때문에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 하고 떠나 보내게 된다니, 다시 세 계절을 참고 내년 가을을 기약하게 된다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는 신체의 세포들 처럼 기억도 일정한 주기로 삭제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가을을 즐기지 못 할 것을 걱정해 기억을 삭제한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면 마찬가지로 끔찍할 것 같다. 과거의 계절들을 아름답게 물들여 주던 사람들과의 추억은 간직할 가치가 충분히, 아니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묻어 버려야 한다고들 하지만, 과거의 추억들을 잊게 된다면 아예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잃는 것과 같은 기분일 것이다. 어차피 가을이까, 조금 더 멋대로, 꽉 막히게 행동해도 괜찮을 것이다. 가을이니까.
얘기가 나온 김에 더 해보자면, 작년 가을 초, 나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 분의 능력이 대해 실짝은 질투를 하던 사람을 잃었다. 내 인생의 1/3을 같이 하던 소중한 사람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처음 만난 날 부터 나를 친동생 처럼 챙겨주는 것은 물론 나의 이야기를 항상 다 들어주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항상 존대어를 쓰며 나를 존중해 주었다. 나는 그 당시 그 분과 대화할 때 존대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분의 영향으로 후에 그 분이 사라지고 그 분을 기억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존대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도 감사하고 더 과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은혜롭기 까지한 분이셨다. 그런데 사라지기 전 마지막 날 까지도 아무렇지 않다가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것이다. 당시 너무나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는 잠시 방황했지만 이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그 분을 조금씩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가끔 그 분과 함께 했던 날들의 기록을(대부분 사진이다.) 보며 그 당시로 돌아가 행복감에 젖어 있기도 하고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분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내가 그토록 따르고 사랑하고 존경하던 그 분을 기억하고자 이번 4월에 달아 놓은 노란 리본은 아직도 떼어 놓지 않고 달아 놓았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제발 연락을 봐 달라고, 한 번만 다시 만나 달라고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을 일어나지 읺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 분을 생각하면 항상 울컥해진다.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둘 다 기억을 잊어 서로를 알아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너무 안타깝고 슬플 따름이다. 영원히 잊으면 안 되는 기억 중에 하나가 그 분과의 기억이다. 생물학적 형이 없는 나에게 유일한 ‘형’이셨던 그 분을 잊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과의 기억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아직 가을이 다 오지도 않았지만 가을에 대하 참 많이 생각하고 있다. 가을이 어서 오길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을이 싱그러운 바람 한 줌과 함께 스쳐 지나가듯 빨리 사라질까 걱정을 하다니 참 우스운 꼴이 맞다. 기온이 제대로 떨어지려면 2주 가량이 남았는데 벌써 가을 감성에 젖어 학업은 뒷전에 이야기나 써내려가고 있느 걸 보면 이런 내가 참 미련하기도 하다.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고 나서 있을 즐거운 추억들을 머릿속 도화지에 그려본다. 벌써부터 그림을 너무 많이 그리면 도화지가 꽉 차버릴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도화지가 점점 확장되는 기분이다. 가을이 오고 나서 느낄 감정들이 어서 다가오면 좋겠다. 가을이 어서 문을 힘차게 열고 나에게로 찾아 오기를 바란다. 그 때 까지는 ‘정규 4집’ 리즈 시절 이문세와 ‘가을이 오면’을 부르며 지낼 것이다.
14. Nov
이제 위의 글을 보니 저 한 여름에 무슨 생각으로 가을에 대해 논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가을이 온 지금 준혁이와 하루 종일 농구를 하며 좋은 날씨를 즐기고 있다. 그러고 보니 15년 동안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다. 처음 지필고사를 보기 시작하는 나이 15살. 그 나이 덕에 나는 처음으로 가을에 대한 새로운 필터를 끼게 되었다. 기말고사의 계절, 더 나아가서는 수능의 계절. 이미 기말고사를 위해 공부하는 나는 너무도 가혹하고도 슬픈 사실이지만 더 이상 가을을 이상적이고도 아름다운 계절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각설하고 내가 기말고사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이 오래된 메모장에 다시 무언가를 끄적 거리는 이유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일가라는 소설의 한 부분 때문이다. 롄변에서 내려온 한 아저씨가 일가 당숙이라며 16살 남자 주인공네 집에 잠시 머물게 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이 책은 결국 아저씨가 자신으로 인해 주인공 가족의 평화가 깨진다는 것을 느끼고 집을 떠나며 끝이 난다. 아저씨가 떠난 후 주인공은 국어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일가 中
[국어 선생님이 그랬다. “내가 내 외로움 때문에 울 수 있다면 아직 그가 덜 컸다는 증거고 나와 상관없는 남의 외로움 때문에 울 수 있다면 이미 그가 다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선생님이 그 말을 할 때는 무슨 뜻인 줄 정말 몰랐다. 중략. 그러나 지금 나는 나의 일가, 당숙 때문에 울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이 대목을 읽다가 작년 가을 내 형을 떠나보내던 장면과 올 여름 막바지 그를 생각하며 혼자 깊은 밤 글을 끄적이다 눈물을 쏟아 낸 장면이 곂치며 또 한 번 울컥했다. 얼마 전 내가 그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은 나의 외로움 때문일지 아니면 그의 외로움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를 더 이상 만나지 못 하는 나, 그와 함께 할 때 더 잘 해주지 못한 나의 외로움 때문에 흘린 눈물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나를 어쩔 수 없이 떠나며 느낀 외로움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또 다시 한 번 울컥한다. 내가 그의 떠남 이후 흘린 눈물이 모두 그를 잃은 나의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자괴감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낌과 함께 폭포같이 쏟아지는 미안함을 주체할 수 없다. 남겨진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하소연할 수도 있는 입장인 반면 그는 나를 떠나가는 외로움을 혼자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잘 해주지 못한 내게 그가 나를 떠나며 외로웠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외로웠을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요즘도 악기를 손을 잡을 때, 맛 있는 음식이 앞에 있을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을 때 종종 그를 생각한다. 함께 악기 연주를 하고 함께 맛 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재밌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울컥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 때 까지는 그 눈물들이 나의 외로움 때문이었지만, 앞으로 내가 그를 기억하며 흘리는 눈물에는 그의 외로움에서 우러난 눈물이 섞일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남의 외로움 때문에 울 수 있다.” 그를 위해 울 수 있다.
9.Jan
가을은 다 가버렸는데 ‘가을의 오면’을 계속 듣는 내 모습을 보면 어딘가 가을 향이 나는 구나 싶어. 인생의 가을인가? 어른들은 지금이 우리 인생의 봄이라고들 하지만, 아직 어른들이 보기에 어린노무시키인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가을, 쌀쌀하고, 외롭고, 더 큰 추위와 생사의 위협인 겨울을 대비해야 하는 시기이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가을이 맞는 거 같아. 가장 큰 상실, 우리 학교 친구들과 친구같던 선생님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일찍 오면 농구를 하거나 악기 연주를 하고, 수업을 듣고 점심엔 다시 반복, 그리고 하교를 할 때면 사시사철 날씨가 어떻든 항상, 그렇게 나무들과 풍경이 아름다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소소하던 것들의 부재가 광활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어야 되나, 산책을 해야 하나, 내가 가을에 뭘 하던지도 잊었어. 가을의 계절이 사라져 버린 우리의 사계절이 밉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아마 한 3년 전 쯤인 것 같은데, 나는 가을 언저리마다 가을에게 바치는, 가을의 향기를 써내려 가고 있어. 써야겠다 라고 작정하고 쓰는건 아닌데 가끔 가을이라는 것이 너무나 외롭고 쌀쌀하고 씁쓸하게 느껴질 때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쑥 다가오거든. 보통 가을이 거의 다 다가오는 8월 말 쯤부터 11월 중후반 내에서만 썼던 거 같아. 그때가 내가 생각하는 참 가을이고 영감이 떠오르는 것도 그 시기 뿐이어서.
그런데 지금 내가 또 이렇게 가을을 느끼다니. 다 너희들 때문이야. 졸업식이 끝난 그 몇시간 후 부터 가을이 오면만이 머리속을 맴돌아. 다시 만나자는 너희의 다짐, 헤어질 때가 다 됐는데 괜스레 아쉬워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우리네 발걸음, 내가 3년 동안 신기해하고 멋있어 하던 사람이 준, 그 사람이 멋있는게 맞다는 증명이자, 내가 신기해하던 사람은 마지막까지 너무나도 신기하다는 원더인 그 편지. 그들의 정취는 가을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가 없을테지.
내가 별로 좋아하는 포맷은 아니지만, 계절을 순환해. 내가 느끼는 이 가을이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던 봄이 될 걸 확신하고, 그 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을 때보다도 더 어색할거야. 서로에 대한 실망과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때에 우리가 만나면 계절은 우리의 첫 해보다 빨리 갈거야. 이미 한 번 겪어본 것이기에, 금방 뜨겁고 격렬하던 여름이 올 것이고, 또 다시 외롭고 쓸쓸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 올거야.
그 가을이 올 때 쯤, 다시 갈 때 쯤. 난 아마 다시 이 노트장을 꺼내들겠지. 겨울은 점점 추워지고 길어지겠지만, 다시 봄은 온다는 위안이 우리의 희망일 것이고, 그 희망 덕에 우리는 각자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추억을 잊지 않고 따듯함을 지킬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이런 얘기들을 하는 나야 말로 지금 모든 걸 다 잃고 희망이나 한 줄기 잡아 끌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우리 반이 너무 재밌고 행복했다는 얘기를 너무나 하고 싶은데, 월요일부터 학교를 안 가기 시작하니까, 너희와의 추억이 너무 빠르게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특정한 이벤트나 감정들, 우리가 함께 즐기던 실없는 개드립들은 여기에 쓸 만큼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것은 내게 너희와의 추억이 소중하다는 증거, 너희와의 이별을 겪고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너희가 정말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
너희와의 이별은 겪은 내가 너희를 잊지 않고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다시 만날 날을 위한 희망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다시 만난 날 진짜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들과 하지 못한 말들을 할 때에 참고하기 위해. 그렇게 가을이 나를 찾아와줌에 감사하는 것. 너희가 너무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너희를 위해, 너희를 위하는 나를 위해, 그렇게 서로를 소중한 추억으로 여기다가 다시 만날 우리를 위해, 그 공간의 atmosphere를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 가을을 위해. 뭐 그런 것들을 위해.
필리아라는 말을 아나? 아가페랑 에로스는 많이들 아는데. 사랑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잖아. Ágape, Eros, Philia.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 에로스는 성적인 사랑, 그리고 필리아는 친구 간의 우정이나 사랑을 뜻한데 우리나라의 ‘정’ 포지션이야. 그래, 너희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려고 이렇게 긴 얘기를 돌아왔다. 에로스는 아닐거 아니야. 아가페는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르는데, 필리아로써, 사랑한다. 아니 필리아라는 쉴드 없이도 말할 수 있어. 사랑한다. 너무 고마웠고, 즐거웠고, 너희라서 다행이었다. 잘 지내라, 그리고 꼭 다시 만나자. 많이 그리울거야.
p.s. It’s snowing autumn innit? J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