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옥 Jan 01. 2024

통도사 홍매화

    


  통도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이들의 입시기도를 하러 다니면서부터였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IC에서 통도사 경내 주차장까지는 10여 분 정도 걸리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땐 산문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절까지 걸어가는 것도 좋았다. 산문 입구에서 절까지 가는 길은 차도와 보행자 도로로 나누어져 있다. 양쪽 길 모두 울창한 소나무 숲과 청량한 개울물이 함께하지만, 보행자 도로로 걸어가는 묘미는 따로 있었다.

  길 위에 떨어진 솔잎이 쌓여 금빛 양탄자를 밟는 느낌, 풋풋한 풀꽃 내음이 가슴을 적셔내는 두근거림, 돌돌 거리며 흐르는 맑은 개울물, 정자형 찻집에서 향기로운 차 한 잔 마시는 여유까지 부릴 때는 기도밖에 해줄 게 없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니던 내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설 명절을 지내고 난 1월 말 오랜만에 통도사를 찾았다.

  절 앞 개천에는 수정 같은 얼음 아래로 영취산靈鷲山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목으로 우뚝 버티고 있는 몇 그루의 느티나무를 지나서 온갖 잡신들로부터 도량을 수호한다는 4대 천왕이 양쪽에서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천왕문을 넘어서자 쌀쌀한 바람결에 어디서 봄 내음이 묻어왔다. 천왕문 가까이 있는 극락전과 영각影閣(역대 주지 스님이나 고승의 초상을 모신 곳) 사이에 봄의 단내를 실어 보낸 주인을 볼 수 있었다. 수령이 삼백오십 년 정도 되었다는 매화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검고 투박한 나무둥치와 나뭇가지 끝마다 연분홍 꽃이 총총히 달려있다. 채 피어나지 못한 봉오리들은 더욱 붉은빛을 띠고 봄을 부르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 이 겨울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꿀벌 몇 마리가 잉잉대며 춤추고 있는 게 아닌가.

  매화는 청록으로 단청한 절집 처마 끝에 걸려 살랑거리기도 하고 기와지붕에 올라앉아 그 고혹한 자태를 뽐내기도 한다.

  절 안에는 수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 그중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가 이 영각 앞에 있는 홍매화다. 이곳에는 두 그루의 홍매화가 있는데 먼저 연분홍 꽃을 피우는 나무와 뒤를 이어 다홍에 가까운 진한 분홍색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통도사의 홍매는 자장 매라고도 부른다.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법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 매화는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월 중순부터 봉오리를 맺기 시작해서 3월까지 꽃을 볼 수 있다.

  통도사의 홍매화가 피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돌면 각지에서 많은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오늘도 이 홍매를 화폭에 담느라 화가의 손놀림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사진작가도 여러 곳에서 각도를 맞춰가며 찰칵거리고 어린아이들도 까치발을 하고 꽃구경을 한다.

  온갖 수목과 화초들이 자태를 뽐내는 여름과 가을날, 그저 없는 듯이 있다가 추운 겨울 거칠고 투박한 몸뚱이에서 제일 먼저 꽃과 향을 피워내니 옛사람들은 절개를 매화에 비유했으며, 꽃말을 용기와 고결이라 명명하지 않았을까.     

  꽃향기에 취해 있던 나는 아쉬움을 잠시 접어두고 금강계단과 대웅전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터라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각 전각에 들러서 참배하였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고 돌아 나오는데 눈에 들어온 하늘이 참으로 맑고 푸르다.

  언제 손 내밀었는지 연분홍 매화 가지가 푸르디푸른 하늘 끝에 걸려 하늘거린다.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어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는 도종환 시인의 홍매화 한 구절은 읊으며 산문을 나섰다.


           

작가의 이전글 그리움에 담긴 부끄러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