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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꽃물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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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옥 Dec 18. 2023

그리움에 담긴 부끄러움

                                                                                                               박정옥                  

   창을 통해 들어온 겨울 햇볕 한 줌에 마음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때 ‘카톡’ 하는 메시지 알림 소리가 났다.

  ‘오늘은 정 선생님 생일이네요. 음력으로 동짓달 열나흘! 마침 화요일이라서 예전 같으면 신촌에서 공부 마치고 점심 먹으면서 케이크 자르고 축하했을 텐데, 시도 때도 없이 불쑥 그리워지곤 합니다.’ 

  지난 7월에 영면하신 정진권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이 메시지를 시작으로 단톡방 화면은 추억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수필 공부를 하는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몇 분의 스승님이 계신다. 나는 가끔 일기처럼 끄적여 두었던 글들에 만족하며 수필이란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여겼다. 이런 얼치기 나를 등단으로 이끌어 주시며 글을 쓸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 주신 임헌영 선생님, 수필은 문학에 있어 진경산수화의 구상화라고 하시며 마음이 향기로워야 글에서 향기가 난다고 하시던 정목일 선생님, 두 분은 오래 함께하고 싶었지만, 인연이 길지 못했다.

  가장 오래 배움을 청했던 스승님은 정진권 선생님이셨다. 몹시 힘들고 지쳐있던 내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은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이 제일일 것 같았다. 등단 후 몇 년을 덮어 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하고자 두드렸던 문 안에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아버지 같으셨다. 아버진 농촌에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셨다.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나와 교단에 서셨고 문교부 편수관까지 하신 선생님이 왜 아버지 같은 느낌이 났을까? 그건 스승의 엄중함보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더 깊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언제나 교실에 먼저 오셔서 우리를 기다려 주셨고 지금처럼 날씨가 추울 땐 꼭 붕어빵이나 호두과자를 사 오셔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한시漢詩를 몹시 사랑하셨던 스승님은 수업 시간에 시 한 편을 들려주시고 옛 문인들의 시에 있는 정겨운 시어詩語와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새기게 하셨다. 그 가르침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가끔은 ‘아 또 어려운 한문이네. 잘 읽을 줄도 모르는데 수필은 안 하시고 한시만 하시고.’ 나는 마음속으로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한시漢詩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한 주 먼저 글을 제출하게 하시곤 미리 우리글을 살펴봐 주시고 다음 수업에서 작은 토씨까지 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첫 수필집 『가죽 벨트가 있던 이발소』를 낼 수 있었고 서평을 부탁드렸다. 한편 한 편 읽어 보시고 지도해 주셨는데 그 고마움이 얼마나 큰지 그때는 다 깨닫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아져서 강의를 못 하는 날이 가끔 생겼다. 그래도 퇴원 후 언제나처럼 맑고 밝게 웃으시며 수업을 해주셨다. 우리들의 합평 수준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하실 정도로 대단하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수업 후 담소와 함께하는 식사였다. 대구탕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이면 세상 다 가진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베레모 깊이 눌러쓰시고 등 가방 메고 조용히 걸어가시는 모습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노신사였다. 선생님은 우리와 하는 시간이 참 좋다고 하셨다. 그러나 한 해가 다르게 선생님 건강이 나빠 보였고 수강생들은 이제 좀 쉬시길 바랐다. 행여 오가는 길에 위험한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우리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께선 수필 교실이 없어질까 더 염려하셨다. 

  그즈음 자주 오른쪽 어깨와 팔이 아팠던 나는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이나 한의원에 가면 컴퓨터를 하지 말고 좀 쉬라고 했다. 핑계 삼아 수필 교실을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언제 교실에 나올 것이냐고 전화하셨다. 

  “선생님 저 어깨가 아파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그냥 나와서 앉아있으면 되지 듣는 것도 공부가 되는데….” 

  “그냥 어떻게 나가요. 팔이 좋아지면 나가겠습니다.” 

  살갑지 못한 내 목소리에 섭섭한 듯 전화를 끊는 선생님 모습이 보이는 듯했지만, 선생님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해 겨울 수필 교실은 문을 닫았고 우리는 선생님 건강을 위해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신 두 달에 한 번씩 선생님 모시고 식사하는 날을 정 했다. 첫 번째 모임 후 선생님께선 다음을 기다리는 것이 참 기다며 매달 만나자고 하셨다. 

  얼마 후 5월, 피천득 선생님의 문학 세미나에서 우리 선생님이 “그리운 琴兒선생님” 으로 강연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은 무척 반가워하시며 저녁을 먹자고 하셨는데 그럴 수 없는 사정이라 그냥 왔다.

  그것이 마지막 뵌 모습이었다. 선생님께선 우리가 약속한 만날 날을 하루 남겨두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그러고는 영영 오지 못할 길로 가셨다. 입원 내내 중환자실에 계셔서 면회 한 번 못 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영안실에 계신 선생님은 국화꽃 속에서 자애로운 미소로 반겨주셨지만, 난 술 한 잔 올리고 분향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 선생님은 내 책장 안에서 슬그머니 나와서 ‘고양이로 수레를 끌게 해서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몽당숟가락」이나 「비닐우산」으로 내 생활에 슬그머니 들어오시기도 한다. 내가 중국음식점에 가면 어느새 「짜장면」으로 내 옆에 와계신다. 때로는 내 수필집 서평에서 가식 없는 글을 쓴다며 어깨를 툭툭치고 가신다. 그런데 나는 ‘보고 싶다.’ 하시는 아버지한테 ‘팔이 아파서 못 가요.’ 하고 톡 쏘아붙인 철없고 부끄러운 딸 같은 심정이라 한없이 죄송하다. 다시는 선생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뵐 수도 없다. 점심 반주로 하는 소주 한잔 함께 짠! 하면서 건강하시란 인사말은 더더욱 할 수 없다.



날씨가 매섭다. 

어느새 음력 11월 동짓달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선생님과 남편의 생일이 같은날이다. 

두 사람다 이제는 만날 수 없지만 이렇게 옛글 한편 꺼내 보면서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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